23명 숨졌는데 ‘기약 없는 단죄’… 유족 “삶이 무너졌다”

입력 2025-06-22 18:47 수정 2025-06-22 18:48

“우리는 아직도 1년 전 6월 24일에 멈춰 있습니다.”

경기도 시흥에서 22일 만난 고 박영화(49)씨 유족 이승철(57)씨는 “매일 법원과 시청, 아리셀 앞에서 농성을 하다 결국 직장까지 잃게 됐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삶이 무너졌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며 “1심 재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해 6월 24일 화성 아리셀 배터리 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숨진 지 1년이 흘렀지만 유족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정부가 약속했던 제도 개선은 더디고, 중대재해처벌법(중처법) 적용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비판이 여전하다.

당시 사고는 회사 측이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비숙련 근로자를 제조 공정에 불법 투입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불량 전지가 폭발해 화재로 이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비상구 문은 피난 방향과 반대로 설치돼 있었고, 신규 채용이나 작업 내용 변경 시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할 안전 교육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등 총체적인 안전 부실이 드러났다.

아리셀 참사 이후 박순관 대표는 지난해 9월 중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중처법 시행 이후 대표가 구속된 첫 사례였다. 그러나 박 대표 측은 “실질적 경영자는 아들인 박중언 아리셀 총괄본부장”이라며 “피고인은 모회사의 대표로서 일부 보고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지난 2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유족들은 책임자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고 엄정정(24)씨의 유족이자 아리셀 산재 피해 유가족협의회 대표인 이순희(51)씨는 “박 대표가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며 중처법 처벌을 피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23일 수원지법 앞에서도 기자회견을 열고 책임자 처벌과 법 개정을 촉구할 예정이다.

실제 중처법 위반으로 대표가 실형을 선고받는 사례는 드물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유죄가 확정된 사건은 15건에 그쳤다. 이 중 경영책임자가 실형을 확정받은 사례는 징역 1년이 선고된 1건뿐이다. 나머지 14건은 모두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정부가 약속한 후속 대책 이행도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9월 행정안전부와 고용노동부 등 관계 부처는 아리셀 참사 이후 총 37건의 개선 과제를 확정했다. 하지만 관련 법령 개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소방청은 화재 위험성이 높은 리튬전지 등을 화재예방법상 특수가연물로 지정·관리하기 위해 시행령 개정을 추진 중이지만, 현재 연구용역 결과를 기다리는 단계다.

고용부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추진 중이지만, 아직 법안 발의조차 이뤄지지 못한 부분이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사업장 배치 전 기초 안전보건교육 의무화를 위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며 “사업주가 공정안전보고서를 작성하고 이행상태를 점검받는 공정안전관리(PSM) 제도의 구체적 방향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처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처법 전문인 조재민 변호사는 “중처법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시행령에 안전보건 조치 기준을 구체화해 경영책임자의 책임을 명시해야 한다”며 “중처법이 성립될 수 있음에도 검찰이 불기소하고 있는 관행 역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찬희 조민아 기자 becom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