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가운데 전도서가 주는 전언은 특별하다. 성경 전체의 주제 곧 창조에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 사역에 비추어볼 때, 전도서가 건네는 ‘헛됨’에 대한 일관된 강조는 크나큰 의외로움을 선사한다. 물론 우리는 전도서가 전하는 지혜가 그저 ‘인생무상’을 알라는 비관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성경은 고난 후의 영광, 부정 뒤의 긍정이라는 반전을 항상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서의 메시지 역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궁극적 승인과 긍정으로 귀결될 것임을 예견하게 된다.
그동안 전도서는 솔로몬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첫머리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1:1)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탁월한 지혜로 백성들을 통치한 위대한 정치인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세상 다른 것보다 지혜를 간구하던 신앙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 연구자들은 전도서가 솔로몬 저작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간 전도서 저자를 솔로몬으로 이해한 것은 실증적 오류라고 하긴 어렵다. 우리가 고전적 목소리를 접할 때 흔히 ‘공자님 말씀’이라 하는 것처럼 일종의 제유(提喩)적 발상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전도서를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의 권위 아래 배치함으로써 이 책이 무명씨(無名氏)의 개인적 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 지혜 전승 맥락에 있는 가르침임을 드러내려 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는 얘기다.
정작 문제는 이 지혜자가 유별나게 삶의 ‘헛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말함으로써 절대 허무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반복되는 ‘헛됨’의 원어(原語)는 ‘숨’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함축한다. 인간의 삶에 어떤 고정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변하고 사라져갈 뿐이다. 언뜻 보아 불교 사상과 접맥되는 듯도 하고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와 맞물리기도 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전도서의 ‘헛됨’이 삶에 대한 근원적 회의조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놓인다는 역설의 수사학으로 관통되고 있다는 점을 천천히 발견하게 된다.
전도서 맨 앞에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3)라는 근원적 질문이 던져진다. 이는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2:22)는 비관적 질문과 맞물린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인간은 어디서 보람이나 가치를 찾을 것인가. 이것이 전도서가 던지는 엄혹한 질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유동적이며 제한적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1:13)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1:13) 것들뿐이다. 그런데 이런 말씀에 귀 기울이면 어떨까. 모든 일에 하나님의 ‘때’가 있고 그만큼 ‘행·불행’으로 인생을 갈라 사고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하는 말씀 말이다.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적절한 ‘때(Kairos)’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전도서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3:11)은 인간의 유한자로서의 자각과 깊이 연관된다. 지혜자는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3:17)면서 주재자 없는 삶의 굴곡을 승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때’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유한자로서 경험하는 ‘영적 체험’이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서 전도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12:1)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것들을 창조한 이를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는 신의 허구성이나 무력함을 강조한 책들이다. 도킨스는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는 제안에서 신의 비존재성과 피조성(被造性)을 거듭 주장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 가운데서도 말씀과 침묵으로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힘겹고도 힘있게 만나야 한다. 이때 전도서는 독창적인 문학적 수사로, 서늘한 반전의 은총으로, 그 만남의 장을 고유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지혜가 수반하게 되는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고통, 그 고통을 넘어서는 궁극적 관심을 한껏 경험해보는 것도 하나님께서 ‘때’를 실현하시는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