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의 글로벌 기업 탐구] ‘창조적 콘텐츠 역량’의 힘, 100년 디즈니 왕국 세우다

입력 2025-06-24 00:31

미키마우스 시작으로 캐릭터 창조
TV방영·테마파크 등 추가 수익 창출
픽사·마블·21세기폭스 등 대거 인수
옴니채널 전략 엔터산업 선두 도약

디즈니는 광범위한 비관련다각화 기업으로 흔히 인식된다. 그러나 다양한 사업 분야를 관통하는 공통의 역량을 보면 디즈니는 핵심 역량의 선택과 집중이 매우 강한 기업이다. 핵심 역량은 가장 경쟁력 있는 역량이 아니라 기업의 다양한 사업 분야에 경쟁력을 제공하는 공통의 뿌리가 되는 역량이다. 디즈니의 핵심 역량은 창업자 월트 디즈니의 “우리 모든 사업이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는 한 마디에 압축된다. 다양한 디즈니 사업의 공통 뿌리는 미키마우스 등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콘텐츠 역량인 것이다.

창조적 콘텐츠라는 핵심 역량 탄생

빈농 집안 출신인 월트 디즈니는 1923년 형 로이와 함께 할리우드에서 만화영화 사업을 시작했다. 1928년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인 최초의 유성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로 대성공을 거뒀고, 이후 새로운 캐릭터를 계속 창조했다. 1937년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개봉했을 때 미국 전역의 백화점 체인에서 캐릭터 상품을 판매했는데, 핵심 역량인 창조적 콘텐츠를 다양한 사업에 적용해 수익을 창출한 것이다.

2차대전으로 영화 제작이 어려워 백설공주를 재개봉했는데 뜻밖에 흥행이 성공하자 디즈니는 과거 콘텐츠를 활용하는 새 수익 모델을 만들었다. 종전 후에는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면서 신속히 제작할 수 있는 콘텐츠를 최대한 많은 채널에 배급해 수익을 창출했다. 콘텐츠 확보를 위해 ‘보물섬’을 시작으로 매년 3개의 영화를 제작했고, 배급사 부에나비스타를 설립해 배급 수익을 내부화했다. 1955년 캘리포니아에 디즈니랜드를 개장했는데, 핵심 역량인 창조적 콘텐츠를 테마파크를 통해 경험하는 신사업에 적용한 것이다. 이어 플로리다에 디즈니월드와 엡콧(EPCOT)센터라는 미래지향적 테마파크를 기획했으나 1966년 암으로 별세하며 창업가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급성장 이후 찾아온 위기

최고경영자(CEO)를 계승한 형 로이가 1971년 디즈니월드 완공과 함께 세상을 떠난 후 1984년까지 3명의 CEO가 디즈니를 이끌었는데, 이 기간 개장한 도쿄 디즈니랜드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들은 단기 수익 극대화 자체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창조적 역량이 위축돼 콘텐츠 창작이 부진에 빠졌다. 게다가 1980년대 초 엡콧센터와 케이블 사업 재정 악화로 회사가 위기에 처했으나 우호적 투자자들 덕분에 생존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파라마운트 대표를 지낸 마이클 아이즈너가 1984년 CEO가 됐다. 그는 디즈니의 핵심 역량인 창조성과 상상력, 최고의 품질을 통한 성장을 약속했다. 치밀한 스타일의 아이즈너는 각 사업의 성과를 철저하게 통제했으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창조적 과제만큼은 전폭 지원했다. 애니메이션 재건을 위해서는 제작자 제프리 카젠버그를 중심으로 매년 한 편의 장편 만화영화를 여름방학 때 개봉키로 했다. 그 결과 1989년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킹’ ‘포카혼타스’ ‘노틀담의 꼽추’ ‘토이스토리’ ‘헤라큘레스’ ‘뮬란’ 등을 매년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창출된 창조적 콘텐츠를 극장 상영, 비디오 판매, TV 방영, 캐릭터 상품·기념품, 의류, 테마파크, 뮤지컬, 크루즈, 호텔 등 다양한 사업에 적용해 대규모 추가 수익을 창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디즈니는 위기에 빠졌다. 1992년 개장한 유로디즈니가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해 실패했고, 애니메이션의 주역 카젠버그가 아이즈너와의 갈등으로 퇴사해 드림웍스를 세우며 경쟁자가 됐다. 아이즈너는 콘텐츠 배급 채널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반격하기 위해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액수로 ABC를 인수했다. 하지만 부채 비율이 34%로 급증하며 재무적 위기를 맞았다. 여파로 애니메이션 등 핵심 역량 사업이 부진에 빠졌고, 2005년 개장한 홍콩디즈니도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적자에 시달렸다. 아이즈너가 비용 절감을 위해 콘텐츠 제작비를 삭감하자 핵심 역량의 원천인 창조적 인재들이 대거 떠나며 위기가 심화됐다.

또다시 핵심 역량을 통한 재도약
2005년 디즈니의 최고경영자로 영입된 밥 아이거. 아이거는 창조적 콘텐츠 창작자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주문했다. 디즈니 홈페이지

2005년 밥 아이거로 CEO가 교체됐다. 그는 창조적 콘텐츠 창작자에 대한 절대적 존중, 자유분방한 상상력,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않는 과감한 도전을 선언했다. 아이즈너와 달리 적임자를 발굴해 권한을 전적으로 부여하는 임파워먼트 리더십을 실행한 결과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조직문화가 회복됐다.

아이거는 핵심 역량인 창조적 콘텐츠를 최대한 신속히 업데이트하기 위해 대규모 인수·합병(M&A)을 단행했다. 2006년 픽사를 시작으로 2009년 마블엔터테인먼트, 2012년 루카스필름을 차례로 인수했고, 2019년 21세기폭스까지 인수해 막강한 콘텐츠 역량을 확보했다. 이를 관객에게 신속히 공급하기 위해 디즈니+, ESPN+, 훌루 등 스트리밍 서비스, ABC와 ESPN 등 방송과 케이블 네트워크, 테마파크 등 모든 채널을 총동원하는 옴니채널 전략으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산업의 선두로 재도약했다.

아이거 후임으로 디즈니파크 대표였던 밥 체이펙이 2020년 초 취임했다. 비용 절감을 최우선시하는 그는 콘텐츠 관련 예산과 기획·배급 의사결정을 집권화하며 크리에이터의 자율성을 대폭 줄였다. 그 결과 창조적 동기부여가 급속히 약화되며 위기가 재발했다. 또 스트리밍 사업 경쟁에서 실패하며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고,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과의 소송으로 사내 창작자뿐 아니라 할리우드 창작자들과도 정면 충돌하게 됐다. 위기가 심화되자 2022년 11월에 체이펙이 해고되고 밥 아이거가 CEO로 복귀했다. 아이거는 악화된 수익성 개선을 위해 2023년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쇠퇴기에 접어든 케이블TV 사업을 대폭 축소했다. 스트리밍 사업 경쟁우위 확보를 위해 2024년 비아콤18과 훌루를 디즈니+에 통합해 거대 스트리밍 플랫폼을 건설했다. 그 결과 위기가 진정되며 디즈니는 다시 세계 10대 기업으로 회복됐다.

우여곡절 겪는 위대한 기업의 생애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위대한 기업도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면 일로매진보다 온갖 우여곡절과 부침을 겪으며 한 걸음씩 뚜벅뚜벅 생존해온 것을 디즈니 100년사에서 배울 수 있다. 지난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요건은 핵심 역량이다. 강력한 핵심 역량은 뿌리깊은 나무와 같이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창출하는 원천으로 장기 생존과 성장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핵심 역량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불연속적 환경 변화가 발생할 때는 강한 핵심 역량이 핵심 경직성이 돼 생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기업들은 21세기 들어 세계 10위권 경제로 급성장시켜 준 글로벌 패스트 세컨드 전략의 핵심 역량에 발목이 잡혀 2015년 이래 숨가쁘게 급변하는 환경에 정면대응하지 못하고 핵심 경직성에 빠져 있는 느낌이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