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소를 다시 적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1950년 10월 29일 해롤드 보켈(옥호열·1898~1984)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교 총회에 보낸 보고서 상단에는 ‘평양(Pyeng Yang, Korea)’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엔군 군목 신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동참했던 보켈 선교사는 “38선을 넘어 평양에 다시 왔지만, 이곳은 내가 알던 그 도시가 아니다”며 “모든 것이 바뀌어 예전의 선교사 숙소조차 알아보기 어렵다”고 기록했다.
전쟁으로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보켈 선교사가 평양 서문교회를 찾았던 당시 예배당 안은 성도들로 가득했고 교인들은 힘찬 목소리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서울에서 가져온 신약성경 상자를 청년들이 들여오자, 회중은 책의 정체를 깨닫고 손뼉을 쳤다고 전했다.
보켈 선교사는 평양 대부흥의 결과로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던 북녘의 빈자리를 확인했다. 그는 “북한에서 가장 크고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부재”라며 “이 땅에 복음을 다시 전할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평양을 거쳐 원산에 머물던 보켈 선교사는 중국 공산당의 참전으로 유엔군 후퇴 명령이 내려지자 함흥에서 흥남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기독교인을 대거 탑승시켜 생명을 구했다. 포로수용소 군목으로 일하며 거제도고아원을 설립해 운영한 그는 51년 9월 27일 보고서에서 “포로들의 약 10%가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주 포로수용소에서 열린 운동회에 참석해 미국과 한국 장교들과 함께 뛰며 열정과 창의력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한인 목회자도 있다. 배민수(1896~1968) 목사다. 19년 3·1운동 당시 함북 성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른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농촌부 총무로 기독교 농촌운동을 이끌었다. 52년 11월 12일 부산항으로 귀국한 배 목사는 같은 해 12월 미 북장로교에 보낸 보고서에서 궂은 날씨에도 서울 제주 거제 대구 수원 등지에서 온 50여명의 지인과 친척들을 만났다고 글을 시작한다.
배 목사는 귀국 후 첫 주일인 11월 16일 부산 중앙장로교회 연합예배를 회고하면서 “약 700명이 참석했지만 공간이 부족해 들어오지 못한 이도 많았다”며 “사회자는 ‘모든 한국인이 미국으로 가길 원하는 이때, 배 목사는 고통받는 한국을 위해 스스로 돌아왔다’고 소개했다. 그날 45분 동안 용기와 사랑, 믿음의 능력을 설교했다”고 남겼다.
배 목사는 부산에 머물며 교회들을 순회했고 성미(聖米)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성미운동은 가정에서 식사 때마다 가족 수만큼 숟가락 한 술씩 쌀을 덜어 교회로 가져와 모으는 운동”이라며 “교회는 이렇게 모은 쌀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다. 내가 돌아와 처음 시작한 사역으로 여러 교회로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최영근 장로회신학대 역사신학 교수는 1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들어온 목회자들의 사역은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 사회와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며 “이들의 기록을 반추하며 위기 속에서 복음과 공동체를 붙잡았던 한국교회의 뿌리를 되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