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천하보다 귀한 눈물

입력 2025-06-20 00:31

가끔 정치인이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나는 그때마다 삼국지의 유비를 떠올리곤 한다. 유비의 장수 조자룡이 성안에 갇힌 유비의 아이를 구해오는 장면이다. 자룡은 아이를 갑옷에 감춰 품에 안은 채 홀로 수천의 조조 군사와 싸웠다.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자룡이 아이를 유비에게 바치자, 유비는 감격하며 아이를 안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아이를 땅에 내던지며 외쳤다. “이 아이 때문에 자룡을 잃을 뻔했구나!” 자룡이 당황해 머리를 조아리자,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았다.

어린 나이에 삼국지를 읽을 때 나는 이 장면에서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와,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더니,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올까.’ 두 번째 읽을 때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유비가 진심으로 울었을까? 아니면 백성의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계산된 눈물이었을까.’

비단 유비뿐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인물이 있다. 바로 다윗이다. 그는 정적 사울과 그 아들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수년간 자기를 죽이려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원수가 죽은 것이다. 사필귀정이라며 정의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그들을 위한 조가(弔歌)를 지어 부르며 눈물을 보였다.

사울이 죽은 뒤에도 내전은 계속됐다. 북쪽 지파들은 사울 가문을 따랐고, 남쪽 유다 지파만이 다윗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북쪽 군대의 최고사령관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런데 다윗은 이번에도 조가를 지어 바치고, 옷을 찢으며 소리를 높여 울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해 진심으로 그를 따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다윗이 진심으로 원수들의 죽음을 애도한 것일까. 아니면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일까. 정치인의 눈물은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다.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는 정치인을 보며 인간적인 면모에 울컥하기도 하고, 때로는 계산된 통치 기술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진정한 눈물은 행동으로 증명된다. 국민적 참사 현장에서 유족을 끌어안고 눈물을 보여도, 참사의 책임자를 규명하고 재발을 방지하려는 실질적 조치가 없다면 그 눈물은 공허하다. 광주의 묘비를 닦으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 정신을 입법과 제도로 실현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대통령도 몇 차례 유세 현장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그의 비참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제는 미래를 잃고 절망하는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현실적인 정책으로 그 눈물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기를 바란다. 국민 통합은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힘은 차가운 실용주의와 뜨거운 눈물의 결합에서 나온다.

둘째, 진정성 있는 눈물은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 역시 불쌍한 인간임을 자각할 때 흘리는 절망의 눈물이다. 다윗의 세 번째 눈물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진압하면서 그는 통곡했다. 압살롬의 반역에는 다윗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았다. 반역을 용인하면 나라는 망하게 되고, 진압하면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는다. 이 딜레마 앞에서 다윗은 절망했고, 울부짖었다. 그 눈물은 그를 정치인에서 한 인간으로 돌아오게 한 눈물이었다. 그는 그 눈물을 통해 왕의 자리보다 더 중요한, 자기 자신을 되찾았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장동민
백석대 교수
기독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