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코시역에서 김승복 선생과 시미즈 선생을 만났다. 우리는 ‘마루누마 예술의 숲’으로 향했다. 1980년대, 실업가 스자키 가쓰시게가 시작한 이 레지던시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해 왔다. 최근에는 한국의 공예 작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국경 너머 예술의 감응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명구 작가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찾았다.
‘마루누마’는 일본어로 ‘둥근 늪’이라는 뜻이다. 이름부터 공간의 성격을 암시하는 듯했다. 발을 들이면 어느새 생각에 잠기게 되는 밀도 높은 공간이었다. 스자키 회장과 바움쿠헨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내가 한국에서 온 시인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삼계탕과 삼겹살 이야기를 꺼내며 유쾌하게 웃었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배려가 공간 전체에 배어 있었다. 누구든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세심히 설계된 공간이다.
막 짐을 풀던 박지원 작가와 함께 하명구 작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도록을 펼쳐보니 코가 빨간 도깨비와 ‘樂’(락)이라 적힌 술단지, 십이지신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도자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전통을 경쾌하게 환기했고, 익살과 진지함이 절묘하게 공존했다. 옆작업실의 아스카 이리에 작가는 동판화 위에 다양한 질감의 한지를 콜라주하고 있었다. 용의 비늘을 한 조각씩 붙이듯 정교한 반복은 한 편의 서사시 같았다.
수장고로 자리를 옮겼다. 앤드루 와이엇의 수채화와 드로잉, 우키요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초기작 등을 만났다. 한 기업의 수장고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루누마는 단순한 후원의 공간이 아니었다. 예술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실험의 장이었다.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탐색하며, 그 울림이 지역에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돕는 장소. 고립 없이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조용한 배려. 이것이야말로 예술가를 존중하는 방식 아닐까. 돌아오는 길, 김승복 선생이 말했다. “둥근 늪에 잠시 빠졌다가 나온 기분이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