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얘기다. 수석급 취재원과 점심을 하는데, 기자 개인 신상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출신 학교나 지역뿐 아니라 부모님과 형제의 직업, 전 출입처 때 에피소드까지. 아마도 대변인실에서 사전에 정보를 줬던 것 같다. 짐짓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걱정 마세요. 박 기자님 존안자료 안 봤으니까.” 발음도 어려운 ‘존안자료’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순간이다.
존안(存案)은 ‘없애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다. 실상은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사정기관이 공직 인사에 대비해 정리한 대외비 인사 파일을 통칭하는 용어다. 그날 이후 국정원 직원이나 청와대 인사참모, 정보경찰을 만날 때마다 존안자료에 대해 캐물었다. 어떤 식으로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는지, 정리된 자료가 청와대로 곧바로 전달되는 구조였는지 등등.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사무관급 이상 공무원, 대학의 조교수 이상, 국영기업과 대기업 임원급, 언론사 차장 이상 주요 부서 기자, 주요 종교기관의 성직자, 학원·재야·시민단체 간부 등 약 10만명의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는 정도만 알게 됐을 뿐이다.
자료엔 별의별 뒷사정이 다 적혀 있다고 한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 김중권씨는 청와대 인사를 발표하며 존안자료를 참고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내용 일부를 소개하며 “여자 관계가 깨끗해야 하겠더라”는 말까지 했다. 사생활의 내밀한 부분까지 다룬다는 뜻이다.
과거 청와대가 존안자료에 의존하니 문서를 작성하는 국정원 국내파트 정보관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결국 무수한 불법과 부작용을 낳았다. 국가가 당신의 약점을 쉽게 알 수 있으니 애초에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자성의 분위기가 퍼지기보다는 그저 정보 수집자나 자료를 작성하는 조직에 잘 보여야 산다는 식의 처세가 난무했다. 애초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겠나. 인사 검증을 빌미로 한 사람의 약점을 잡고, 이를 이용해 국가가 개인을 지배하려는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국정농단을 딛고 출범한 문재인정부는 인사 때 존안자료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다 공직 후보자 낙마가 이어지자 존안자료 대신 경찰 첩보에 의존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검증 부실이 발생한다는 핑계를 댔다. 새로운 검증 기준이나 방법 개발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아 쉽게 수긍이 가진 않았다.
최근 ‘차명 부동산’ 논란 끝에 사퇴한 오광수 전 민정수석 사례를 보며 존안자료를 둘러싼 궁금증이 다시 피어올랐다. 오 전 수석 관련 자료가 존재할까. 실제로 있다면 차명 부동산 관련 내용도 포함됐을까. 대통령실 인사검증팀은 이 자료를 참고했을까. 취재가 안 되니 별의별 의문이 다 든다.
국정원 국내파트 정보관은 사라졌지만 존안자료는 건재하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2022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박정희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60년간 축적한 존안자료가 국정원 메인 서버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자료는 여야의 불행한 역사다. 남겨놓으면 안 된다. 그래서 특별법을 제정해 폐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못 했다”며 아쉬워했다.
이재명정부는 초유의 계엄 사태를 딛고 출범했다. 해묵은 적폐는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더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국정원이 갖고 있는 존안자료부터 전격 폐기하는 건 어떨까. 나랏일이라는 미명 아래 민간인 사찰이 당연시되던 부당하고 아픈 과거와 작별하는 선언적 조치가 될 터다. 국정원의 반발도 예상되지만 왠지 이재명 대통령은 뚝심있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