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샤는 묻는다… 폭력의 시대, 예술은 사치인가

입력 2025-06-20 00:01
김주혜 작가가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한 호텔에서 열린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 작가는 “이번 작품은 예술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환원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제 개인의 포괄적 예술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김주혜 작가는 첫 번째 장편 ‘작은 땅의 야수들’, 단 한 편만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작가로 발돋움했다. 지난해 톨스토이 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 수상은 그 결실이다. 첫 소설이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여성을 주인공으로 굴곡진 한국의 근대사를 그려냈다면, 두 번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여성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은 무엇인지,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소설은 최고의 발레리나로 가장 높이 날아오른 순간 불의의 사고로 가장 깊은 바닥으로 추락한 주인공 나타샤가 사고 후 2년이 흐른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전하는 이중 서사 구조 형식이다. 공간적으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과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을 무대로 펼쳐진다. 소설의 전개 순서도 서막-제1~3막-코다-커튼콜로 이어지는 발레의 형식을 차용했다.

나타샤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단어는 ‘결핍’이다. 이따금 손찌검하는 엄마와 얼굴도 모른 채 떠나가 버린 아빠, 거기서 파생됐을 거 같은 가난이 나타샤의 어린 시절을 짓누른다. 그에게 “가난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가난하게 행동하는 것, 즉 더 많이 가진 자의 관대함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탈출구는 발레였다. 하지만 최고가 되겠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발레 선생님에게 “최고가 되려는 욕망만 좇는 사람은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꾸지람을 듣고, “발레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그 자체”이자 “그런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나타샤에게 예술은 ‘욕망과 인정’에서 벗어나 풍성해지고 깊어진다.

이제 그에게 예술은 “배고픔도 투지도 열망도 모두 녹여버리고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기는” 것이고 “완벽한 몇 시간이라는 희박한 가능성을 위해 전부를 거는 사람처럼 나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예술의 정점은 ‘이타심’에 있다고 선언한다. 전쟁과 기근, 폭력, 억압, 빈곤의 세상에서 예술의 역할에 고민하는 나타샤는 “내가 이룬 최고의 업적은 우스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아는 예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지만, 자아를 잃는 것이야말로 곧 예술의 정점이라는 깨우침이 내가 가장 확신하는 진실이다.”

나타샤는 작가 김주혜 자신이다. 작가는 지난 17일 신작 출간 간담회에서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지구적인 양극화 등 사회가 혼란할 때 예술을 말하는 것이 사치이진 않은지 스스로도 고민한다고 했다. 그는 “진정한 예술은 사치를 누리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지는 것”이라며 “예술은 전쟁과 양극화의 시대인 지금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예술은 결국 사랑과 인간애를 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말리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기아에 관심을 두고 있던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의 수익금 일부를 ‘카리타스’라는 국제구호단체를 통해 북부 소말리아의 한 학교에 지원하고 있다.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는 예술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환원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제 개인의 포괄적 예술 생활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품은 영어로 쓰였고 한국어로 번역됐지만 읽는 내내 원래 한국어로 쓰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천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그의 한국어는 유창하다. 자신을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문학인”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어 번역본을 받고 “수명이 단축될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2달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교정에 매달린 결과물이다. 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것처럼 노력한다”는 작가와 발레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나타샤가 겹쳐진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