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교회당 불타… 맨발의 성도들 잿더미서 주일 예배”

입력 2025-06-19 03:00
6·25전쟁은 신앙과 사명의 자리에도 흔적을 남겼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복음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발굴해 소개한다. 국민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 전장의 한복판에서 복음을 붙들었던 내한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조명한다.

마가렛 아담스 선교사가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당시 피란 상황 보고서를 작성했다. 프린스턴신학대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1950년 6월 25일 자정 무렵이었다. 충남 보령 대천해수욕장 인근의 한 숙소. 미국 북장로교 연례 수련회를 위해 모여 있던 그곳에 급보가 전해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향해 남침했다”는 내용이었다. 라디오 방송은 청취자들에게 대피하란 말만 반복했다. 내한 선교사들의 긴 탈출 여정이 시작됐다.

전쟁 발발 직후 미 북장로교 소속 조지 J 아담스(안두조·1907~2002) 선교사 가족이 겪은 이 여정은 아내 마가렛 R 아담스 선교사가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한 후 직접 집필한 보고서를 통해 전해진다. 보고서는 미 북장로교 본부에 전달됐으며 현재 프린스턴신학대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아담스 선교사 가족 사진. 미셔너리즈 제공

보고서는 “우리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약 160㎞ 떨어진 대천 해변에서 연례 수양회를 진행 중이었다”며 “이 지역은 당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 덕분에 대부분 선교사가 함께 모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확실하고 위험한 시기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모든 선교사와 한국교회, 지도자들,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덧붙였다.

마가렛 선교사가 남긴 피란 기록은 당시의 급박한 전황을 반영한다. “밤이 되자 공산군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긴급하게 대구로 철수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아이들이 탄 트럭은 다리 옆에서 미끄러졌고, 군용 트럭 한 대는 길목에서 뒤집히기도 했다. 마가렛 선교사는 “만약 그 차량에 우리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보고서는 공포 대신 감사로 여정을 마무리했다.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부가 작성한 회람에 따르면 대천에 모였던 선교사 90여명은 트럭과 지프를 나눠타고 대전 대구 부산 등지로 흩어졌고, 일본 벳푸와 도쿄, 교토 등지로 분산 배치됐다. 기록을 남긴 아담스 부부는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1959년까지 선교를 이어갔다.

미 북장로교 총회 서기 존 톰슨 피터스 목사가 1950년 11월 서울 시내를 묘사한 보고서. 프린스턴신학대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같은 해 11월 말, 폐허가 된 서울을 기록한 선교사도 있다. 종군기자 신분으로 파견된 미 북장로교 총회 서기 존 톰슨 피터스 목사다. 그는 보고서에서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 같았다. 주변에는 러시아 전차, 미군 전차, 박격포, 포탄 파편, 파괴된 도로가 널려 있었고,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며 “이 극도로 긴박한 서울의 나날들 속에서도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해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 편지를 쓴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피터스 목사의 글이다.

“서울역 중앙우체국 YMCA 그리고 수많은 교회당이 모두 불탔다. 그러나 주일 아침, 폐허 사이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시작했다.”

피터스 목사는 주일예배에 참석해 기록을 남겼다. 매트리스 헝겊으로 만든 양복 차림의 장로부터 맨발의 성도들, 전기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 교회당까지.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낙담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오히려 그 자리를 두고 “마음속에 감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했다.

이 같은 기록들은 전쟁 속 선교사들의 피란과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1차 사료로써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과 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교회의 원조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최은수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 객원교수는 1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보고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수많은 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함으로써 전쟁의 참혹함과 한국 민중, 교회의 고통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통로가 됐다”며 “전쟁 속에서도 생명을 품었던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존재를 잊지 않게 해주는 귀중한 증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