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백제는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렸지만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서울(한성기)에서 밀려나 공주(웅진기)에 도읍을 정해 살았다. ‘무령왕과 왕릉원’은 475년부터 538년까지 웅진기 왕들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에서 약간 떨어진 왕릉원에는 1∼4호분 무덤이 있는데 그 무덤 주인공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국가유산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소장 황인호)는 2023년부터 왕릉원을 재조사한 결과 그중 가장 크기가 큰 2호분의 주인이 개로왕(21대)의 직계 후손 중 유일한 10대 왕이던 삼근왕(23대, 개로왕 손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17일 서울 중구 퇴계로 한국의집에서 조사 성과 보고회를 열고 무덤에서 출토된 금귀걸이와 함께 나온 어금니 2점에 대한 법의학적 분석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웅진기에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이 재위했다. 삼근왕은 아버지 문주왕(개로왕 아들)이 3년 재위 끝에 암살당하자 13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5세에 사망했다. 1호분은 문주왕, 3∼4호분은 크기 등으로 미뤄 왕족 무덤으로 추정됐다.
왕릉원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도굴된 상태에서 조사가 진행된 바 있고, 이번에 96년 만에 재조사가 이뤄졌다. 2호분에서는 화려한 금귀걸이도 출토돼 무덤 주인이 왕이라는 추정에 무게를 실어준다. 금귀걸이는 청색의 유리옥이 달린 정교한 자태를 뽐낸다. 백제 초창기인 한성기 귀걸이와 웅진기 후반부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 귀걸이의 중간 형태다. 이와 함께 줄무늬를 새기고 도금한 은반지도 발견됐다. 재질은 다르지만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 비슷한 형태의 금반지가 출토된 바 있다. 황인호 소장은 “당시 백제와 신라 왕실 사이에 혼인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며 장신구의 스타일과 제작 기법이 공유돼 이런 반지가 유행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점도 수습됐다. 이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됐다. 공주대학교 김기호 교수는 “백제가 동남아시아 지역과 직접 교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유리옥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서 위기에 처한 백제가 선택한 타개책이 외교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이번 조사 성과는 정치적 혼란기로만 인식됐던 웅진기 전반부터 백제가 내부 정치체계를 다지고 대외 교역망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연구소는 분석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