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단오, 십장생도…. 외국 인기 작가들이 한국에서 개인전을 할 때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가져와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 방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대중문화에서 시작한 K-컬처의 위상이 순수 미술계로 확장한 현상이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21세기형 ‘역 오리엔탈리즘’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소재한 코오롱 그룹의 예술 공간 ‘스페이스 K’에서는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독일 여성 작가 소피 폰 헬러만(50) 개인전이 한창이다. 지난 4월 개막한 전시 제목은 ‘축제’다. 유럽의 축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행하던 세시풍속 단오를 소재로 했다. 헬러만은 독일 낭만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선과 색이 유려한 구상 회화를 하며 특히 벽화 작업으로 인기를 얻었다. 한국 전시에서도 떡갈나무, 무지개 등을 그린 벽화 형식의 회화가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군데군데 캔버스 회화가 걸려 있는데 거기에 그네뛰기, 씨름, 활쏘기, 탈춤 등 단오의 놀이 장면이 담겼다. 전시 기획자는 17일 “한국 개인전이 확정되면서 전시 주제로 단오와 한국 문학 등 몇 가지를 제안했고, 작가가 단오를 택했다”고 전했다. 이어 “명맥만 남은 단오 전통이지만 외국 작가가 이를 소환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을 하게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오는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압축 성장한 한국의 일상 문화에서 이미 사라진, 교과서 속 전통으로 남았다. 서구에서 건너온 핼러윈이 일상 축제로 자리 잡은 것과 대비된다. 헬러만은 그런 단오를 그리기 위해 김수남 사진작가의 사진집을 참조해야 했다. 작가가 단오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사 이미지를 재현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 유명 작가가 한국 개인전에서 한국 전통을 접목한 작품을 선보이는 트렌드가 뚜렷하게 가시화한 것은 지난해 가을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열렸던 스위스 작가 나콜라스 파티(45) 개인전에서다. 경매 시장의 핫 스타로 세계적인 갤러리 하우저앤워스 전속 작가인 파티는 ‘파스텔화의 마법사’로 불린다. 서양미술사의 명작을 참조하는 작품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전시에서도 십장생도 등 전통 민화에서 착안한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기획자는 “작가가 동아시아 회화 전통에 관한 관심이 있었다. 민화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이를 참조해 제작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미술사를 참조한 작품에서는 오랜 사유 끝에 나온 특유의 은유 대신 즉물적인 이미지만 있다. 십장생도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복숭아가 지닌 상징에 대한 고려는 없다. 복숭아도, 사슴도 인물 초상 위에 장식처럼 둘러 쳐졌다.
대구미술관에서 연초 개인전을 마친 이집트 현대미술가 와엘 샤키(54)는 ‘금도끼 은도끼’ ‘토끼의 재판’ ‘누에 공주’ 등 한국 전래동화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이를 판소리꾼이 직접 작창을 해서 창을 하는 ‘러브 스토리’라는 제목의 다채널 영상을 제작해 선보였다. 전시 기획자는 “커미션 신작을 하기 위해 작가가 한국을 세 차례 방문해 안동 등을 답사했다”고 말했다. 판소리꾼 여성의 이미지가 반전 영상으로 처리됐고, 한국 초가집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짚 설치 작품도 함께 나왔다.
한국이 서구화되며 전통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를 외국의 유명 작가가 주목함으로써 우리가 소홀히 한 전통에 관한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적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네 뛰고 씨름하는 단오 문화가 일상에서 사라졌고, 판소리도 일상에서 누리는 음악이 아닌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유명 작가에게 한국의 전통을 소재로 단시간에 작업하게 하는 방식은 발효 과정이 없는 표피적인 이미지 재현에 그치거나 문화의 오역이 일어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헬러만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서 영감을 받아 진달래를 그렸는데, 한국의 진달래를 본 적 없는 작가는 우리가 아는 ‘정한의 색’ 분홍 대신에 자신의 나라 진달래색인 노랑 진달래로 표현했다.
사진작가 K씨는 “최근의 트렌드는 K-컬처의 위상 강화에 기대보겠다는 기획자의 상업적인 마인드가 깔려 있지 않겠냐”며 “이런 식의 작품 제작에선 한국 문화가 장식적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구인이 동양을 대상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처한 ‘역 오리엔탈리즘’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외국 유명 작가에 기대기보다 한국 전통을 숙성시킨 한국 작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캐나다 교포 2세 작가로 영국에서 활동 중인 제이디 차(42)는 2023년 스페이스 K에서 개인전을 하면서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설화에서 영감을 받은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를 선보였다. 그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이야기에 내재한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며 ‘지혜로운 가모장’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 한국의 전통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 좋은 사례를 보여준 제이디 차는 올해 4월 영국 최고 권위의 미술상 ‘터너상’ 후보에 올랐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