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인구의 40%가량이 아파트에서 산다. 우리가 고층 건물에 살면서도 깨끗한 물을 충분히 쓸 수 있게 된 것은 수십층 높이로 끌어 올려주는 펌프 기술이 개발된 덕분이다. 소방차의 물이 닿기 어려운 고층에 불이 나더라도 소화전과 스프링클러를 통해 초기 진압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고층 아파트, 업무 빌딩, 병원, 호텔, 산업체 등 물을 사용하는 모든 건물과 시설물에 들어가는 펌프는 건물 높이, 물 사용량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 수백가지 금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외국 기업이 출혈 경쟁을 벌이며 시장에 진출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도 1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미국 플로서브, 덴마크 그론포스, 독일 윌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국내 건물용 펌프 시장은 독일계 윌로그룹의 한국법인인 윌로펌프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인 2000년 LG전선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펌프 부문을 윌로펌프가 인수하면서 나타난 지각변동이다.
임직원 수 100여명의 펌프 기업 두크는 업력이 겨우 20년을 넘은 후발주자지만 매년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면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18일 경기도 군포 두크 글로벌 비즈니스센터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관을 지낸 원동진 두크 대표를 만났다. 원 대표는 “10년 내 건물용 시장 1위 등극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 대표의 포부는 희망 섞인 허풍이 아니다. 두크의 매출액은 2020년 311억원에서 지난해 537억원으로 4년 동안 72.7% 증가했다. 경쟁사들이 같은 기간 매출 하락을 겪거나 정체된 흐름을 보인 것과 대조적이다.
두크의 성장의 원동력은 연구개발(R&D) 투자다. 펌프는 한 번 설비가 끝나면 교체할 일이 많지 않다. 10년 전 제품이 아직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만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업계의 혁신 활동도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두크는 업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기술연구소를 두고 제품 개발 투자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두크는 지난해 R&D 비용으로 매출액 대비 5.2%인 약 28억원을 사용했다.
결과는 혁신으로 나타났다. 두크는 국내 소방펌프 시장의 트렌드를 수평으로 누워있는 형태의 횡형 다단 터빈펌프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입형 소방펌프로 변화시켰다. 소방펌프는 오랜 시간 물을 담아두고 있다가 화재 시에만 가동하는 특징이 있어 오래된 건물일수록 부식 확률이 높다. 특히 횡형 다단 터빈펌프는 수년간 물에 잠겨 있으면서 녹이 스는 경우가 잦았다. 화재 발생 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는 사례도 종종 발생했다.
반면 두크가 국내 업계 최초로 도입한 입형다단 펌프는 수직으로 설치하고 물과 접촉하는 부분인 접액부가 스테인리스 재질로 제작된 게 특징이다. 가로 형태로 구성되는 기존 펌프보다 설치 공간이 절반 이상 줄어들고 부식으로 인한 고착 현상도 방지할 수 있다. 두크는 펌프 재질을 고급화하면서도 입형다단 펌프 상하부 덮개를 주철로 제작해 원가를 낮추는 등 제품 개발 과정에서 경제성도 확보했다.
두크가 입형 소방펌프 개발에 이어 국내 최초로 도입한 소방 패키지 시스템은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됐다. 소방 패키지는 펌프와 공통 베드, 흡·토출합류관, 밸브, 성능시험배관을 통합한 ‘올인원(All-in-One)’ 제품이다. 부품을 사전에 모듈 형태로 생산해 공사 현장에서 조립만 하는 탈현장건설(OSC) 공법이 적용됐다.
사실상 완제품을 공급하는 소방 패키지는 펌프 설비가 들어가는 공간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다. 기존 현장 시공 방식 대비 용접 및 가공 작업 시간을 5일가량 단축했다. 폐기물이 발생하지 않는 점도 장점이다. 내진 구조 검토를 받은 내진 베이스를 적용해 별도의 방진가대를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원 대표는 “현장에서 공사하면 근로자의 안전사고 우려가 있고 각종 잉여 폐기물, 공기 증가로 공사 비용 증가 문제가 발생한다”며 “소방 패키지는 소방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녹여낸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두크는 여기에 더해 데이터 진단과 제어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스마트펌프 플랫폼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미 전자 장치와 펌프의 결합을 통해 유량을 계산하는 원격 모니터링 제어 시스템을 구축한 상태다. 이를 통해 물 사용 패턴 분석, 부품 교체 주기 계산 등이 가능하다. 자동차로 치면 윤활유 교체, 타이어 교체 주기 등을 파악해 수명을 늘리는 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급수 펌프는 통상 3개의 펌프가 교차로 운전하는데, 과거에는 8시간씩 기계적으로 번갈아 가며 가동됐다. 이 경우 특정 시간대에 돌아가는 펌프만 많이 사용돼 해당 펌프가 먼저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유량 계산이 가능해지면서 3개의 펌프를 균등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두크는 현재 외국 기업이 쥐고 있는 내수 시장을 되찾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원 대표는 “두크의 혁신 속도를 따라올 기업은 없다”며 “올해 매출 600억을 돌파하고 2030년 800억원, 2035년 1000억을 기록해 건물용 시장 업계 1위로 올라서겠다”고 말했다.
군포=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