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예송논쟁의 나라

입력 2025-06-18 00:32

효종이 세상을 떠난 1659년 음력 5월, 영의정 정태화가 좌우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물었다. “자의전(효종의 새어머니)의 복제(服制)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송시열은 “서자의 경우 3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며 “대행대왕(효종)은 체이부정(體而不正·혈통이지만 정통이 아님)”이라고 답했다. 효종이 임금이지만 인조의 맏아들은 소현세자였으므로 자의전은 3년이 아닌 1년만 상복을 입어야 옳다는 뜻이었다. 정태화가 ‘체이부정’에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송시열의 말을 가로막았다고 실록에 적혀 있다.

누군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놀라 손을 내저은 선비는 현대에도 있을 법하다. 대법원은 헌법 제84조 “대통령은…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의 해석을 요청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끝내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대선이 끝나자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대장동 배임 사건 등을 심리하던 각각의 재판부가 일제히 공판기일을 뒤로 미뤘다. 대통령이 피고인인 재판을 진행하느냐 중지하느냐 묻는 질문은, 대왕대비 상복 기간을 답하라는 요구만큼 가혹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왕위의 정통성을 말하는 건 꺼려지는 일이다.

대선 전후 헌법의 해석부터 새로운 수사기관, 이상적인 대법관 숫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식과 주장이 공론장에서 부딪혔다. 이런 때면 “예송논쟁 같다”는 자조가 뒤따르곤 한다. 짐짓 격렬한 논쟁 끝에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이 결국 정치적 대세라는 점을 겨냥한 듯하다. 국가적 현안처럼 이야기되나 정작 민초의 삶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짚었을지도 모르겠다. 왕비의 상복이든 소추의 개념이든 검찰을 없애고 ‘트리플 특검’을 가동할 당위성이든, 외양은 도덕과 규범이되 속내에는 정치와 권력이 있다.

실록과 신문을 채우는 논쟁들을 함부로 쓸데없다 폄하할 수 없다. 역사가들은 오히려 쓸모없어 뵈는 고담준론의 쓸모를 탐색한다. 시대를 관류하는 화려한 논쟁의 쓸모는 결국 권력층에게 있다. 예송논쟁 당시 조선 지배계급은 임금부터 도망친 임진왜란으로 권위를 잃은 상태였다. 질서를 잡으려는 방편으로 예법을 내걸어 신분과 도리를 강조했다. 지금 한국 집권여당은 대법관들을 탄핵·특검하려 했고 검찰을 없애기로 했다. 공직자의 거짓말을 수사하고 최고법원 판단을 유권자들에게 신속히 밝힌 일이 잘못이라 말하려면, 그 논변이 화려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달아난 양반들이 외치던 성리학이 허망하듯 사법을 ‘리스크’라 불러온 정치세력의 개혁에도 명분은 없다. 특검을 거부하던 대통령이 한심하다면 판결을 피하려던 대통령도 훌륭하기 어렵다. 시간 흘러 당당히 사면을 청구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 정치는 결국 그때그때 우리 편의 정의를 판매할 뿐이다. 언제 누굴 처벌했는지가 늘 다시 문제될 때, 기관 모습을 바꾸는 것이 과연 해법이 되는지도 의문이다. 이제 사라질 검찰의 내부망 ‘이프로스’에는 “현재의 검찰 기능을 담당할 국가기관도 외부 비판과 개혁 대상으로 손꼽힐 것”이라는 글이 있다.

어려서 인조의 계비가 된 자의전은 15년 뒤 1674년엔 며느리의 사망으로 다시 상복을 입었다. 어찌된 일인지 2차 예송논쟁은 효종을 적자로 보는 쪽으로 판례가 뒤집혔다. 달라진 건 경전 글귀가 아니라 당파의 구도였다. 지금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의전에게 1년복이 옳은지 3년복이 맞는지 따지지 않는다. 서인이 셌느냐 남인이 셌느냐 붕당의 흥망으로 이 대목을 외울 뿐이다. 그때 서양은 과학 혁명 중이었다. 기근에 고통받던 민초들에게 대왕대비의 상복 기간을 울며 입씨름하던 벼슬아치들의 꼴이란 우습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