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즐거운 나의 집

입력 2025-06-18 00:33

시장에서 갓 따온 듯 싱싱해 보이는 오이를 사 왔다. 찬물에 담가 씻으니 오돌토돌한 감촉과 뽀드득거리는 소리에 소소한 행복이 인다. 한입 크기로 썰어 도시락통에 꽉 채워 담았는데도 몇 조각이 남았다. 선 채로 남은 오이를 집어먹으니 아삭하고 부서지는 식감에 이어 청량감이 입안 가득 퍼졌다. 오이는 어쩌다 풋풋한 향을 내게 됐을까.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러 화합물이 결합한 결과겠지만, 흙과 햇빛과 물이 공들여 만든 발명품 같고, 지구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산행을 마친 뒤 먹을 아침 식사는 이렇게나 값지다.

출근 전 산에 오른 지도 어느덧 한 달. 어제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새들의 예고처럼, 산은 매일 새롭다. 생명의 숨결을 따라 오솔길을 걸으면 나방 애벌레와 개망초가 길동무가 되어준다. 이슬땀이 맺히고 다리 근육이 팽팽해질 즈음에는 다람쥐와 곤줄박이가 기운을 북돋아 준다. 가쁜 숨을 달래며 마시는 물 한 모금과 전신을 훑고 가는 바람결에 상쾌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인간사의 근심은 가벼이 날아가 버리고 마음은 새 옷을 갈아입는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숲의 신록에 안기어 시작하는 하루. 다시 가족과 일터가 있는 도심으로 향하는 시각은 9시 언저리다.

자연과의 접촉을 늘리는 건, 오랜 나날 바랐던 삶의 방식이었다. 아침 산행은 전보다 더 많은 부지런함을 요구하지만, 하루도 빼놓고 싶지 않은 유희의 즐거움을 준다. 무엇보다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지구에 속한 생명 중 하나라는 사실에 심취했다. 이제 내 집은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의 특정 장소가 아니다. 흙과 물과 해와 바람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공간이다. 계절마다 맛깔난 먹거리를 내어주고 가지각색 동식물이 이웃이 되어주는 지구가 내 집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분에 넘칠 만큼 섬세하고, 친절하고, 너그럽다. 이 모든 기쁨을 누릴 수 있음에 마음이 진동한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