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부동산 블랙홀 잡을 지방 거점 국립대

입력 2025-06-17 00:38 수정 2025-06-17 00:38

우주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다고 여겨지는 블랙홀은 미지의 시공간 영역이다. 블랙홀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실존 가능성을 드러냈고, 1960년대 실측되면서 수면으로 올라왔다. 누구도 생성·소멸·성장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블랙홀은 강력한 밀도와 중력으로 빛을 포함한 무엇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특성을 보인다.

한국 사회·경제에도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다. 국가 자원을 삼키고, 가계부채를 치솟게 만드는 존재.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벌리고, 자산 양극화를 유발하며, 저출산에 이르기까지 마수를 뻗친다. 지금도 불패 신화를 차곡차곡 쌓는 부동산이 그것이다. 한국 부동산 시장은 독특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①수도권 집중, ②미분양과 지방 위축, ③대출·세금 규제도 아랑곳하지 않는 투기 수요, ④금융시장을 압도하는 자산 축적, ⑤청년·무주택자 주거비 부담 증가와 박탈감, ⑥자산 불평등에 따른 청년층 결혼·출산 위협. 몇 가지만 꼽아도 이 정도다.

역대 정부에선 부동산 과열을 식히고, 부동산에 쏠린 사회·경제적 자원을 생산적인 분야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세금을 높이거나 대출을 조이고, 공급을 늘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대학입시, 사교육과 결합하면서 한국 부동산 시장은 강력한 흡입력·폭발력을 갖춘 초거대 블랙홀로 성장해버렸다. 이재명정부의 초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출범과 함께 서울 집값(아파트값)이 들썩이고 있다. 여러 이유로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낮추자 쏜살같이 반응하는 중이다.

한국의 부동산 쏠림이라는 고질병에는 안타깝게도 확실하게 듣는 약이 없다. 그래도,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나갈 단서는 있다. 지방 균형발전, 다르게 말하면 인구 분산 정책이 실마리다. 키플레이어(핵심 선수)는 지방대학이다. 왜 지방대학일까.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26명, 외국 국적자 제외)를 배출한 일본을 보자. 수상자 가운데 단체를 제외한 25명의 출신 대학을 추적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흔히 들어본 유명 대학인 교토대(8명)가 1위이고, 도쿄대(7명)는 2위다. 다음부터는 지방대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고야대가 3명이고 도쿄과학대, 도호쿠대, 나가사키대, 홋카이도대, 고베대, 야마나시대, 사이타마대가 1명씩이다. 혼슈 북동부의 미야기현 센다이에 자리한 도호쿠대는 산학협력과 기초과학 연구에 강점을 지닌 대학이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는 도호쿠대를 졸업했고, 교토의 중견기업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학사학위 노벨 과학상 수상자’다.

일본 지방대의 노벨상 수상이 가능한 배경에는 공공기관, 지역 기업과 연계한 산학연 클러스터가 있다. 공공기관과 지역 기업이 연구·개발(R&D) 인프라를 제공하고, 지방대학이 ‘두뇌’를 공급한다. R&D 결과물은 기업을 살찌우고, 사람을 불러 지방대와 지역을 지탱한다. 반면, 한국의 대학과 인재는 ‘서울로, 서울로’만 외친다. 참여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혁신도시(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정책이 여전히 불안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재명정부는 주식시장을 키워 부동산이 차지한 ‘자산 축적’의 왕관을 뺏고자 한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주택 공급 확대도 고심 중이라고 한다. 여기에 하나를 더 얹었으면 좋겠다. 파격적 정책·예산으로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을 세계적 대학으로 키우는 것이다. 지거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지방 산학연 클러스터가 단단해진다면 사람과 기업이 모이고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수도권만 비대해지는 ‘부동산 망국’이라는 말도 사라지지 않을까.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