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선교사 해상 사고로 순직… 재일 선교사 매클레이 방한

입력 2025-06-17 03:08
2002년 6월 월드컵 경기가 치러지는 가운데 교회 봉사자들이 응원팀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다. 국민일보DB

2002년 6월 1일 ‘2002 한·일 월드컵’이 5월 31일 개막함에 따라 ‘미션 월드컵’ 막도 함께 올랐다. 개막전이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첫 복음전도가 시작됐고 이후 전국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일제히 월드컵 전도 운동이 펼쳐졌다. 각 지역 교회들은 예배당을 개방해 응원에도 동참했다.

1930년대 신비주의 부흥사였던 이용도 목사. 국민일보DB

1933년 6월 6일 이용도 목사와 추종자들이 ‘예수교회 선언’을 발표했다. 이용도 목사는 1930년대 이른바 신비주의 신앙을 확산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3·1운동에 참여해 3년 이상 투옥생활을 했다가 강원도 통천교회로 부임해 중생 체험을 했고 양양에서는 환상 중에 ‘빨간 군대’의 습격에 대항해 싸우는 체험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체험 이후 능력의 설교자가 됐고 예배 참석자들이 통회자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1930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31년 감리교 연회에서 순회부흥사로 파송을 받으면서 전국적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그에 대한 입소문이 확산되면서 장로교회에서도 이 목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고 그는 회개와 신생을 강조했다. 이 목사는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던 평양을 ‘마른 나무깨비 같은 고골통신(古骨痛身)의 꼴’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황해도 재령 서부교회 집회에서는 “벽돌로 담을 쌓고 울깃불깃 장식을 해놓은 것이 교회가 아니에요. 이 예배당을 다 불 질러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아주 바쳐 참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교회올시다”라고 설교하기도 했다. 이 목사는 당시 제도권 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자기희생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겸비를 조건 없이 실천하려 했던 ‘한국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도 불린다.

1883년 6월 9일 일본의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인 손붕구가 이수정에게 성경과 교리를 배우고 세례 문답을 받았다. 21일엔 이수정이 ‘현토 한한신약성경’ 번역을 완료하고 한글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6월 24일엔 이수정이 손붕구의 도움으로 한문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개설했다.

충남 서천 서면 마량리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기념관 모습. 국민일보DB

1902년 6월 11일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인천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던 중 서천 인근 해상에서 충돌 사고를 당했다. 학창 시절 수영 선수였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탈출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한국어 조사(助事)인 조한규와 목포 고향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받은 연동여학교 학생을 찾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

1987년 6월 1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6·10 국민대회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했다. 한국장로협의회도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성명을 발표했다. 21일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고 22일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촛불 평화 시위를 개최했다.

1923년 6월 20일 북감리회 연회에서 공창폐지운동을 결의했다. 공창폐지운동은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1919년 전조선선교사연합대회에서 조선총독부에 공창 폐지를 건의했고 호주장로회는 1920년 사이토 총독에게 공창 폐지를 청원했다. 연합선교사회에서는 매춘 여성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고 강연회 등도 개최했다. 1928년 구세군 교인들은 유곽을 방문해 매춘여성들의 실태를 살피고 고충을 듣는 한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협력해 ‘구제의 집’을 마련하는 등 구제사업에도 힘썼다. 1932년 세브란스의전 학생 YMCA는 ‘화류병’ 예방을 위한 강연회를 열었다.

2004년 6월 22일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피랍된 한국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피살됐다. 사건은 이라크 무장단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가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 철회를 요구하며 벌였다. 당시 교계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김씨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유족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는 한편 테러 단체들의 반인륜성을 규탄했다.

재일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를 위해 고종의 허가를 받아낸 매클레이 선교사. 국민일보DB

1884년 6월 24일 미감리회 재일 선교사인 로버트 S 매클레이가 한국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내한해 서울의 미국공사관을 방문했다. 2주간 일정으로 방한한 그는 김옥균을 만나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고종에게 올리는 탄원서와 사업 계획을 전달했는데 고종은 병원과 학교 사업을 허가했다. 이로써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에 길이 열리게 됐다.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를 위한 대지를 물색, 주한미국공사관 근처 경사 지대를 매입할 수 있도록 당시 푸트 공사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이듬해 아펜젤러가 교육사업을, 윌리엄 스크랜턴이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를 목표로 각각 내한할 수 있었다.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이었던 조선성교서회(조선예수교서회) 모습. 국민일보DB

1890년 6월 25일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가 설립됐다. 조선성교서회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한 문서사업기관으로 체계적인 문서선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언더우드, 헤론, 올린저 등 3명 선교사의 노력으로 설립됐으며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 정기간행 잡지류를 발행해 전국에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15년엔 ‘조선예수교서회’로 개칭하기도 했다.

1920년 6월 26일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일본 총리에게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전문을 발송했다. 이듬해 6월 26일엔 한국과 만주의 장로교 선교사 100여명이 평양신학교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일본의 선교사 박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