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인기가 치솟으면서 선수들에 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뜨겁다. KBO리그 대표 인기 구단 LG 트윈스는 매 경기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이 중심엔 10년 가까이 LG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 중인 임찬규(33)가 있다. 임찬규는 야구공을 처음 잡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LG 팬이었고 프로에 입단한 뒤로는 15년째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있다. 자칭 타칭 ‘엘린이’(LG+어린이, LG 어린이 팬을 지칭) 출신 원클럽맨으로 팬들은 임찬규에게 ‘낭만 야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지난 10일 LG 홈구장인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임찬규는 “제 야구 인생의 고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해보다 올해, 어제보다 오늘이 더 성장한 내가 목표다. 분명히 더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팬들에게도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야구소년에서 어느덧 팀의 주축
임찬규가 LG에 합류한 건 2011년. 고졸 신인 투수로 입단했을 당시 LG는 오랜 부진에 빠져 있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이 단 한 차례도 없던 ‘암흑기’였다.
성적 부진에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자주 물갈이됐고 선수들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지금은 ‘무적 LG’라는 응원 구호처럼 팀 전체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당시에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좋을 수 없었다. 임찬규는 “예전에도 선배들이 솔선수범하며 후배들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후배들이 잘할 수 있도록 큰 소리도 내고 더 잘되기를 바라며 알려주고 혼도 내고 하면서 분위기를 다잡고 있다”고 말했다.
‘야구 소년’은 어느덧 프로 15년 차 베테랑이 됐다. 그의 성장과 함께 LG도 포스트시즌 단골로 변모했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 연속 ‘가을 야구’에 나갔고 2023시즌엔 29년 만에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LG의 오랜 팬이자 주축 선수가 된 임찬규에게도 우승 경험은 남달랐다. 그러나 임찬규는 우승 후 자신에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그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임찬규는 원소속 구단 LG와 협상을 벌였고 4년 총액 50억원(계약금 6억원, 연봉 20억원, 인센티브 24억원)의 조건에 도장을 찍었다. 옵션 달성에 따라 지급하는 인센티브 비중이 높아 당시에도 ‘금액이 적다, 많다’ 논란이 있었는데, 지난 시즌과 올해 꾸준한 성적을 내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혜자 계약’, ‘가성비 FA’라는 평가가 나온다. 임찬규는 “그때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계약이었다. 결과적으로 잘했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고 계속 잘하면 한 번 더 FA 계약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면 될 것 같다”고 겸손해했다.
올 시즌 ‘완성형 기교파’로 활약 중
아직 전반기가 끝나기 전인데도 임찬규에게 올 시즌은 이미 특별한 해다. 지난 3월 26일 시즌 첫 등판 경기에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완투·완봉승을 기록했다. 15년의 프로 생활 중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꾸준한 구위를 유지하며 33세의 나이에 완성형 기교파로서 한 차원 더 성장했다는 걸 스스로 증명했다. 임찬규는 “개인의 성적이나 다승은 정말로 생각하지 않는다. 팀 승리가 우선이다. 팀이 승리하고 우승하는 데 집중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어 “빠른 공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를 맞아가면서 경기를 풀어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안타를 허용하더라도 실점은 줄여가면서 이닝을 소화하는 제 방식대로 던진다면 앞으로도 오래 던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베테랑 투수로서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세대교체를 진행하고 있는 선수단의 중심축을 잡고 있다. 선후배를 잇는 가교 역할과 함께 후배들을 다독이는 데도 열심이다. 특히 지난 시즌 실력을 꽃피운 손주영과 올 시즌 혜성처럼 등장한 송승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두 선수는 좌완 정통파의 느낌이 난다. 둘 다 한국에서 좌완 중 평균 구속이 가장 빠른 쪽에 속하고 구종으로 이길 수 있는 투수들이기 때문에 조금 더 강하고 멋진 좌완 에이스로 성장하면 좋겠다”고 했다.
멘털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건 염경엽 감독 덕분이었다는 일화도 언급했다. 염 감독 취임 전까지 LG는 불펜의 팀으로 불릴 정도로 불펜진이 강했다. 선발이 3이닝에서 4이닝만 막아도 불펜이 나와 승리를 지켜내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발을 일찍 내리는 분위기에 임찬규는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2023시즌 염 감독이 부임하면서 “찬규야 100구까지는 책임져라. 6~7이닝을 부여하겠다. 못 던지는 날이 있어도 100개는 던진다는 생각으로 나가라”라고 해준 말에 책임감이 생겼고 안정감이 불어 넣어졌다고 한다.
변치 않는 투수와 타자와의 거리 18.44m
그의 야구 철학은 ‘18.44m’로 요약된다. 주자가 나가 있거나 위기 상황일 때 임찬규는 투수판과 홈플레이트 사이의 거리인 18.44m를 떠올린다. “주자가 어디에 있든 날씨가 어떻든, 상대 타자가 누구든 간에 18.44m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나의 관점이 두려움을 만들고 나를 위축되게 만든다. 대부분의 어린 투수들은 위기가 오면 더 세게 던지려고 한다. 쓰리 볼에 던지는 직구와 투 스트라이크에서의 직구가 다르다. 투수는 20m, 30m에서 던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투구에 좀 더 집중하고 내가 원하는 공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7할(10번 중 7번) 이상은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등번호 1번에 대한 애정도 크다. 그는 “LG 투수로서 1번은 상징적인 번호다. 정삼흠, 이승호, 우규민 선배 등 LG의 주축 투수들이 달았던 번호다. 팀의 1번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책임감이 있다. 후배들도 달고 싶어하는 번호”라고 했다.임찬규는 내년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전에 대한 의사도 내비쳤다. 그는 “국제대회에는 젊고 강한 투수들이 많이 나가야 한다. 원태인, 손주영 같은 좋은 선수들도 많다”면서도 “만약 제가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선발이든 중간이든 어떤 역할이든 맡아 열심히 던지겠다”고 했다.
임찬규는 꿈도 참 많다. 은퇴 후를 그리며 해설가, 지도자, 방송인 등을 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야구를 최대한 오래 하는 게 소망이다. 그에게 야구란 뭐냐고 물으니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야구는 짝사랑 같다”고 했다. “야구는 짝사랑 같은 존재예요. 사랑하는데, 다 주지는 않죠. 잘 안 풀리면 미워지지만, 잘 되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죠. 자려고 누워도 생각이 나서, 다시 일어나 공을 쥐고 투구 자세를 교정하게 되고.” 임찬규의 낭만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김민영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