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스크린이 없는 AI

입력 2025-06-13 00:50

컴퓨터 스마트폰 키오스크…
스크린에 점령된 현대인 일상에
올트먼과 아이브 개발 중인
‘스크린리스 AI 단말기’ 소식

화면 아닌 주변을 보게 하는
사람 중심 환경 만든다는데
스크린 대신 우리를 에워쌀
그 기술에 숨은 함정은 없을까

사람 사는 모습이 크게 달라질
거대한 변화가 머지 않았다

오픈AI 샘 올트먼은 지난달 아이폰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의 스타트업을 9조원에 인수했다. 둘이 함께 만든다는 인공지능(AI) 단말기는 수수께끼 같은 몇 가지 힌트만 알려져 있다. 전화나 안경이 아니고, 웨어러블도 아니고,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인데, 스크린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뭐라는 건지 챗GPT에게 물었더니, 아마 이런 모습일 거라면서 몇 년 뒤 그것을 사용할 서울 직장인의 하루를 상상해 그려보였다. 그 가상의 인물에 멋대로 ‘민서’란 이름을 붙인 챗GPT는 그가 갖고 있을 AI 단말기를 ‘위스퍼(whisper)’라 부르자고 했다. ‘속삭임’이란 뜻의.

#오전 6시 50분. 민서의 침실에 자연광이 스며들며 환해진다. 위스퍼는 알람을 울리는 대신 수면 상태를 분석해 적절한 타이밍에 전동 블라인드를 열었다. 민서가 눈을 뜨자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날씨는 맑고 미세먼지 보통. 첫 일정은 강남 사무실 9시 회의예요.” #오전 7시 20분. 민서가 거실에 들어서니 커피머신이 작동했다. 그의 동선을 감지하고 루틴을 숙지한 위스퍼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가전제품을 알아서 다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설 때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지하철 2호선 혼잡하네요. 버스가 낫겠어요. 도착까지 38분 걸립니다.”

#위스퍼가 읽어주는 뉴스를 들으며, 때때로 “엄마 생신 선물 뭐 살까?” 같은 잡담을 나누며 도착한 사무실에서 회의는 순조롭게 끝났다. “회의 내용 요약해서 팀원들한테 보내줘.” 회의 내내 꺼진 듯 조용했지만 오가는 대화를 기록하고 있던 위스퍼의 요약본이 메신저로 전송됐다. #오전 11시 30분.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위스퍼가 살짝 속삭였다. “5분 거리에 수제 파스타집이 생겼어요. 평점 4.7점.” 오후 들어 업무에 몰두한 민서에게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까 말한 선물, 배송 주문 마감까지 30분 남았습니다.”(위스퍼) “그래? 그냥 그걸로 해야겠다. 주문해줘.”(민서)

SF 영화 속 장면 같은 챗GPT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구현될지 모르겠지만, 이 상상의 핵심에는 민서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볼 필요 없이 일상의 많은 일을 하게 되리란 예측이 있다. 날씨와 일정을 확인하고 교통편을 검색하고 식당을 찾고 선물을 주문하는, 지금은 스마트폰을 꺼내 고개를 파묻어야 가능한 일을 인공지능과 자연어로 대화하며 처리하는 것. 다시 말해, 이런저런 앱을 조작하느라 붙잡혀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주의를 스크린에서 풀어주는 것이 올트먼과 아이브가 만드는 AI 단말기의 본질일 거라고 이 AI는 설명했다.

과거 거실 TV가 거의 유일했던 스크린은 이제 컴퓨터 스마트폰 키오스크 등 일상을 점령했다. 길을 걸으면서, 침대에 누워서도 화면을 쳐다본다. 구글 MS 아마존 등 빅테크는 전부 스크린 기반의 수익모델을 구축했고, 그 알고리즘은 사람의 시선을 스크린에 더 오래 붙잡도록 진화했다. 시선을 끌수록 돈이 되기에 ‘주목경제’란 용어가, 시선이 늘 붙잡혀 있기에 ‘스몸비(스마트폰+좀비)’란 조어가 나왔다. 챗GPT가 시나리오에서 택한 AI 단말기 명칭 위스퍼는 이런 스크린과의 차별성을 말하려는 거였다. 눈앞을 차지하고 주의를 빼앗는 스크린과 달리 시선 바깥에 머물다가 필요할 때 속삭여줄 거라면서.

스크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아마존 에코 같은 스마트 홈 시스템은 AI를 활용해 음성 기반 인터페이스를 구현했고, 유럽 싱크탱크 어반AI는 아예 도시 전체를 스크린 없이 설계해보자며 ‘스크린리스 시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싹트던 탈화면 흐름이 마침내 우리 행동 습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개인용 단말기로 확대된 것이다.

올트먼과 아이브가 내비친 ‘포스트 스크린 사회’ 구상에 낙관론자들은 “화면을 쳐다보는 대신 주변을 바라보게 해준다” “기술이 아닌 사람 중심의 환경이 된다”면서 환호하고 있다. 그런데, 화면이 사라졌다고 기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조용하고, 더 똑똑하고, 더 치밀하게 우리 곁에 자리 잡을 수 있다. 뒤집어보면, 화면을 직접 조작하며 누렸던 주도권을 내주는 일이고, 항상 켜져 있을 마이크와 센서에 감시당하는 일이며, 더 많은 판단과 결정을 기계에 위임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바뀔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 저 오픈AI 단말기는 내년 말에 출시될 거라고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