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변곡점에 서서

입력 2025-06-14 03:07
게티이미지뱅크

사라의 나이 90, 생리가 끊어진 지 오래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너무 늙었다. 가임기가 지난 불임부부다. 체외수정도 불가능이다. 어느 날 꿈조차 꿀 수 없는 부부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자식을 볼 것이라 한다. 사라는 조소(嘲笑)에 가까운 웃음으로 반응한다. 진지한 것은 하나님이다. ‘왜 웃느냐’고 묻는다. 태몽(?)을 꾸고도 14년 세월이 지났다. 요즘 말로 종 치고 날 샜다. 그런데 아뿔싸! 아이가 태어난다.

100세 인간이 된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시킨 대로 아이 이름을 ‘이삭(그가 웃다)’이라 짓는다. 진지하다 못해 엄숙한 성경에 등장하는 첫 유머다. 그 ‘웃음’을 내놓으라 하신다. 줬으면 그만이지 또 내놓으라는 건 뭔가. 어리둥절이다. 콩가루 집안이란 말이 있듯 내게는 웃기는 집안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감당 못 할 사춘기에 답이 있다. 나라도 사춘기 자식을 달라는데 ‘에라이~’ 하고 얼른 바쳤을 터다.(내 손녀 은유를 달라면 나는 손사래를 치고 내뺐을 거다.)

모리아산으로 오른다. 이삭이 묻는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눈치챈 것일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가슴이 찢어지는 순간이다. 자식을 죽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다. ‘PNR(Point of No Return)’, 회항 불능 지점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브라함은 말한다. “하나님이 손수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말없이 걷는다. 목적지에 도착해 제단을 쌓는다. 장작을 벌여 놓는다. 제 자식을 묶는다. 칼을 치켜든다. 왜 이삭은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기어이 끝장을 보셔야만 했을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믿음의 영웅 서사라 하기엔 너무 슬프다.

내게도 이런 일이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옆구리가 저린다. 묵직한 통증이 번진다. 움직일수록 더 아프다.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하다. 속이 메스껍다. 겨우 주일설교를 끝내고 오후 프로그램도 생략한 채 집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주일이라 병원을 갈 수도 없다. 곧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통증이 더 깊어졌다. 칼로 콕콕 찌르는 듯 아프다. 몸을 웅크린다. 저절로 뭉크(Edvard Munch)의 ‘절규(Strik)’, 아악! 소리가 튀어나온다.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산통(産痛)보다 더 무섭다는 요로결석이란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체외충격파로 돌을 깨기 시작했다. 약 처방을 받아 집에 들어서니 이른 새벽이다. 깨지려니 했던 돌은 두 번의 시술 끝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엉금엉금 기고야 만다. 콩알보다 작은 돌 하나도 이기지 못해 절절매다니. 인간이 이렇게 허약할 수 없다. 알고 보니 나도 허깨비다.

병원 입원실. 남은 길은 수술밖에 없다 한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마치고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 이야기에 기대어 기도한다. 교인도 없고 재정도 모자라 힘들어하는 후배 목사와 대화록이다. “그렇더라도 낙심 말고 기도하며 이기세요. 모세도 기도하니까 바다도 갈라 주고 마실 물도 주셨잖아요.” “근데 저는 모세가 아니잖아요.” “음… 목사님은 모세가 아닌데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세요” “아, 예….”(이대우 목사 페이스북)

간절한 기도에도 응답이 없다. 기어이 환자복으로 갈아입힌다. 수술대 위에 눕기 전, 마지막 소변을 본다. 그때다. 찌릿한 고통과 함께 변기에 퐁당 떨어지는 것이 있다. 나도 모르게 소리친다. “돌~이다!”

나는 알았다. 하나님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칼이다. 자식을 베기 위해 드는 칼이나 환자의 몸을 가르기 위해 드는 칼이나 뭐 다를 게 있나. 카리스마 넘치는 하나님도 ‘칼 있으마’ 앞에서는 꼼짝 못 하신다는 것을. 황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난 배웠다. 하나님만이 시간의 주인이시라는 것. “때가 차매.”(갈 4:4) 아에타스(연대기의 시간)가 템푸스(별의 순간)가 되는 변곡점을 너무도 즐기신다는 것. 나아가 변곡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을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축복하시고 하늘의 별로 빛나게 해 주신다는 것.

기독교문화체험관(GMC) 건축의 과제 앞에 나는 여전히 떨고 있다. “오 하나님! 앞으로 몇 번이나 ‘변곡점 미팅’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글쎄다. 우선 태어날 GMC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면 어떠니?” “푸하하하” 이러다 나도 100세 인간이 될 것인가.

하이패밀리 대표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