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수난 예고 직전에 벳새다의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하면서 외칩니다. 시력을 얻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 바로 다음에 또 다른 벳새다 출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입니다. 그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오히려 예수께서는 꾸짖었습니다. 대신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먼 제자들은 십자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들은 그냥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이런 것들이 더 자연스러운 정글의 법칙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길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공감 장애인’이었다 하겠습니다. 현대 사회에도 사람들은 공감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 청년 전태일은 일기에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시다(견습생)들이 배를 곯는 안타까운 모습에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 주었습니다. 대신 자신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부터 쌍문동, 지금의 창동까지 12㎞, 3시간 반 거리의 먼 길을 걸었습니다. 전태일의 풀빵 원조는 5000명을 먹이신 기적에 나오는 떡 다섯 덩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부려먹는 구조를 어떻게 깨뜨려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분신 항거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평화시장 앞에서 자신의 몸이 타들어 가는 데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외친 까닭은 이웃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고통, 배고픔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공감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수 없는 과제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합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지극히 보잘것없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절망하고 병들고, 슬픔으로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는 사람들, 어렵게 사는 사람들, 바로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 공감 능력이 바로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책임의 크기를 생각할 때 우리는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공감으로부터 시작된 책임의 크기와 이에 비교한 우리의 부족함을 확인할 때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 없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지향과 자세, 즉 우리의 믿음과 은혜로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시각장애인의 눈을 열어 주셨고 공감 장애도 고쳐 주셨습니다. 드디어 바로 옆에 있는 이웃들의 아픔이 눈에 보이고 이제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해주신 피조물들의 신음이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이 오늘 우리를 통해 다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우리 모두를 사람을 사람으로 똑똑히 보게 되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삼으시기를 빕니다.
김거성 목사(구민교회)
◇구민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으로 경기도 구리에 있습니다. ‘바르게 깨닫게 힘차게 일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김거성 담임목사는 문재인정부 시민사회수석을 지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