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혁신은 ‘열린 변방’에서 시작된다

입력 2025-06-13 00:35

기득권이 구질서 방어할 때
변화 직시해 혁신 나선 세력
그들이 주도하면 미래 열린다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급격하다. 초고속 통신기술과 디지털 콘텐츠가 일상을 장악하더니, 이제 인간보다 똑똑하고 어쩌면 더 ‘인간처럼’ 작동하는 인공지능(AI)이 상용화됐다. 좋고 싫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일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바뀌고 새로운 질서가 밀려오면 그에 비례해 강한 저항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질서는 현상을 유지하려는 강한 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기존 세계에서 주도권을 가진 세력은 자기 힘을 총동원해 구질서를 방어한다. 그런데도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전혀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기성 체제를 바꾸는 혁신의 에너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19세기 중반 철선과 대포, 자본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은 동아시아에 문호 개방과 통상을 강요하며 거센 충격을 안겼다. 비슷한 압력 속에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결과는 극명했다. 중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일본은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했으며,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청나라는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이었다.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하다는 인식이 중화의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1793년 영국 조지 3세의 사절단을 이끈 매카트니경이 중국을 방문해 건륭제에게 교역을 요청했을 때, 돌아온 것은 “필요한 것은 이미 다 갖췄으니 외국과의 무역은 필요하지 않다”는 답이었다. 청에 무역은 오직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공 체제의 일부였다. 이런 세계관은 아편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불렀고, 결국 수도 베이징이 외세에 유린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근대화는 한참 뒤처졌고,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도 실패했다.

일본도 초기에는 외세를 배척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칼로는 서구의 대포를 상대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앞에 방향을 바꿨다. 서구를 적극 모방하고 막부 체제를 무너뜨렸다.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은 단기간에 아시아의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그 과정이 주변국에 대한 침탈을 동반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에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일본 근대화는 체제의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시작됐다.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에도(도쿄)의 권력 중심에 있지 않았다. 야마구치와 가고시마 지역에서 세력을 획득한 하급 무사들은 기존 질서 외곽에 있었기에 오히려 체제의 한계를 날카롭게 인식했다. 중앙의 장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변방에서, 서구 문명을 직접 경험하며 세계 변화를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일본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근원적 개혁을 이끌었다.

조선은 달랐다. 수구와 개화가 대립했지만 어느 한쪽도 결정적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청나라 권위에 기대려는 세력과 일본 모델을 추종하는 세력이 부딪혔고,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지만 뚜렷한 비전은 부재했다. 결국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힘으로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했다.

동아시아 3국의 차이는 각 사회를 지탱해온 전통, 복잡한 국내외 조건, 서로 다른 대응의 결과였다. 그래서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외교나 군사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직시하고 혁신적으로 대응했던 주변부적 대안의 형성 유무다. 일본의 경우 변방 세력이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고 체제를 새롭게 재편했다. 청과 조선에서는 그런 변방이 형성되지 않았거나, 형성되었어도 기득권이 지배하는 체제 안에서 억눌리고 소멸됐다. 일본이 동아시아 조공책봉 체제의 변방에 있었다는 점도 그런 혁신의 자산이 됐다.

격변의 시기에 변방은 세상의 전환을 여는 감각과 상상력이 움트는 자리였다. 진짜 혁신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에서, 차별받고 억눌리는 자리로부터 비롯된다. ‘열린 변방’이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주도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열린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