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민은 교회 사람들이 불법 유턴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본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 섬기는 교회 공동체 모임에 속한 지인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교회 앞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모인 오픈 채팅방에 종종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온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속상함이 가득했다.
그의 속상함이 충분히 공감되면서 나 역시 괜한 심술이 났다. ‘그러는 자기들은 얼마나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고. 그들도 안 지킬 때가 있을 텐데’ 하는 치기 어린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속상한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그리스도인이라면 감내해야지. 더 모범을 보이는 게 맞지.’
그러던 차에 최근 한 기독교단체가 성명을 냈다. 한 탐사보도 매체가 자신들의 사역을 ‘로비’로 규정하며 비난하는 기사를 쓴 데에 대한 반박의 성명이었다. 정당한 절차에 따라 교계의 목소리가 담긴 정책을 정치권에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을 마치 이권을 위해 은밀하고 불법적으로 로비를 펼친 것처럼 몰아갔다는 성토가 담겨 있었다.
종교단체라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정치 참여였고, 저출산 시대라는 대사회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공교회 차원에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 했던 일을 왜곡·짜깁기해 폄하했다며 사과를 촉구했다. ‘모욕적’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속상함과 억울함을 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단체가 정치권에 제안한 내용 중에는 종교시설을 지역사회의 돌봄 공백 문제 해소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정비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실제 현행법상 아이돌봄시설에서는 종교활동이나 재정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앞선 매체가 제기한 의혹처럼 막대한 이익을 얻기 위함이라거나 헌법 위에 군림하려는 의도로 보긴 어렵다는 의미다. 그저 여느 사회단체의 요구처럼 기존 법에 ‘손톱 밑 가시’와 같은 부분은 없는지 살펴봐달라는, 교회가 사회의 필요를 살펴 짐을 나눠서 질 기회와 길을 열어달라는 취지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해당 단체의 반박처럼 제안된 정책을 검토해 정책화하는 건 국회와 정부가 판단할 일이지 은밀하게 로비한다고 받아들여질 일이 아니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극우 성향 역사교육단체의 늘봄학교 사업 참여 문제도 교계가 그동안 제안했던 정책에 불똥을 튀긴 모양새다. 초등학교 방과후수업 등 아이돌봄사업에 교계 여러 기관과 교회들도 관심을 두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교회의 처신이 중요해진 듯하다.
교회를 향한 세간의 시선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한층 더 엄격해지는 시대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적용되는 기준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기대하고 더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한다. 물론 성경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때론 세상이 정한 도덕 규범이나 법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줄 정도로 깨끗하고 당당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도 끝없이 세상의 조롱과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더 높은 기준의 잣대를 들이미는 세상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응당 응해야 한다. 성경도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니라 더 높은 기준의 하나님께 평가받는 존재다. 세간의 비판 속에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 있다면 더욱더 넓은 마음과 성숙함으로 겸허히 포용하고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 전파라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감당하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기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영민하고 지혜로워야 할 때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어느 선교사가 책에서 외친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믿음은 분투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