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받기 싫어 관계 피했는데… 이젠 먼저 손 내밀게 됐어요”

입력 2025-06-11 18:51 수정 2025-06-12 18:36
“우리는 매일 문을 엽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일지라도 그 순간 삶은 다시 시작되죠. 하지만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문은 단순한 출입구가 아닙니다. 보호받던 자리에서 홀로서는 세계로 나가는 경계이자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진짜 어려운 건 굳어진 마음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마음속 상처와 어둠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희망까지 누군가에게 내어놓겠다는 결심이니까요.”

㈔홀리베이션(이사장 인명진 목사)이 운영하는 자립생활관 우인에서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들과 동고동락하는 김효선(57) 센터장의 말이다. 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자립생활관에서 만난 그는 “자립의 본질은 관계를 맺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용기를 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홀리베이션은 자립생활관을 통해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매주 월요일 ‘밥플레이’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멘토링을 이어갈 예정이다.

바보들의 따뜻한 동행

지난 3월 설립된 자립생활관 우인은 ‘사람이 사는 집’ ‘더불어 사는 집’ ‘바보가 되는 집’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김 센터장은 “‘바보’ 단어에는 ‘이 일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어리석은 사역처럼 보일지라도 세상에는 그런 바보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인명진 이사장의 뜻이 담겨 있다”며 “우인과 동행하는 분들도 그런 마음을 지녔기에 아이들 역시 타인을 돕는 선한 바보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바보 같은 동행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30년 넘게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자립준비청년들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가까이서 지켜봤어요. 시설 출신 청년이 교회에 오면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어요. 현실을 숨기거나 용기 내어 드러내는 것. 하지만 아이들에게 거짓은 신뢰를 잃게 하고 솔직함은 동정과 상처로 돌아왔죠.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자조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가 본 자립준비청년들은 깊은 내면의 상처로 인해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며 스스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립준비청년들은 자립을 혼자 사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김 센터장은 “진정한 자립은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립생활관에서 피어나는 희망

생활관에는 8명의 자립준비청년이 거주하며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소규모로 운영하는데 마치 인큐베이터처럼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깊이 들어가 세심하게 돌본다.

시작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진심 어린 치유가 이뤄질 때 비로소 긍정적인 태도와 건강한 가치관, 성숙한 인생관이 자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센터장은 “긍정적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도전과제를 수행하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분노를 느끼는지 등을 파악한다”며 “그룹 내에서 이런 내용을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이해를 구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입소한 김하린(익명·27)씨는 “이곳에서 강점 코치를 받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안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알게 됐다. 현재 대안학교 교사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탐색 과정은 인문학 강의 ‘자기 탐색 글쓰기’를 통해 이뤄진다. 윤서아(익명)씨는 ‘처음’이라는 주제 아래 이런 글을 남겼다.

“나의 처음은 매우 선명하다. 슈퍼마켓 바닥에서 도넛 빵을 깔아놓고 촛불을 하나 켜서 아빠가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내 생일도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생일파티를 열어준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그래서인지 첫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진정한 자립은 함께하는 삶

자립생활관의 퇴소 기준은 홀로 서는 힘과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갖췄는가에 달려 있다. 퇴소가 끝이 아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 공공주택으로 독립한 자립준비청년들은 자립생활관에서 받던 돌봄과 지원이 단절되면 또다시 어려워지기도 한다. 지속 가능한 돌봄을 위해 김장철엔 김치를 나누고 고민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게 열린 문을 유지한다. 여전히 아이들 곁을 지켜주며 비빌 언덕이 돼주는 셈이다.

생활관을 나와 자립한 김하랑(가명·25)씨는 “동정의 시선이 싫어 관계를 피하던 내가 이제는 주변에 손을 내밀 수 있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새로운 시도 밥플레이

홀리베이션은 다음 달부터 매주 월요일 밥플레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예배와 따뜻한 식사를 나누고 보드게임, 운동, 코칭 등 가볍지만 의미 있는 ‘함께’의 시간을 이어갈 예정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상이 더 따뜻해질 수 있음을 전하고자 하는 취지다.

김 센터장은 “아이들의 심리적 날개를 복원하는 일에 기초가 돼줄 주거안정 부분은 아직 미흡하다”며 “임대료 걱정 없이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소망을 전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