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루프톱 코리안

입력 2025-06-12 00:40

미국 한인 이주 120년 역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1992년 4월 발생한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 꼽힌다. 흑인 로드니 킹을 마구 때린 백인 경찰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군경이 부유한 백인 거주지를 주로 보호하는 사이 한인 타운이 집중 피해를 봤다. 2500여 업소가 불타거나 약탈당했고 사망 1명, 부상 46명에 재산 피해가 4억 달러(약 5400억원)에 달했다. 삶의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해병동지회, 한인청년단 등 300여명이 한인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해 자경단을 결성해 건물 옥상(루프톱·rooftop) 등에서 폭도들과 총격전을 불사했다. 이들은 ‘루프톱 코리안’으로 불린다.

28년 후 ‘루프톱 코리안’이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으로 소환됐다. 2020년 백인 경찰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해 규탄 시위가 미 전역에 퍼질 때다. 일부 백인들 사이에서 강력 대응 목소리가 높았고 루프톱 코리안이 하나의 모델로 떠올랐다. 미국 총기협회가 수정헌법 2조(총기 휴대 및 소지 권리)의 상징으로 소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인의 가슴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가 흥밋거리로 소비됐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상처를 다시 들춰냈다. 그는 LA에서 불법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가 지속되자 “루프톱 코리안을 다시 위대하게!(Make Rooftop Koreans Great Again!)”라는 문구와 총을 든 한인 자경단 사진을 SNS에 게시했다. 이번 시위를 LA 폭동에 빗대 ‘불법 이민자 vs 무장 한인’의 구도를 내세워 정부의 강경 대응 정당성을 강조한 듯하다.

하지만 한인들도 이민자 단속 대상이 될 수 있기에 트럼프 주니어는 번짓수를 잘못 찾았다. 33년 전 당시 한 자경단원은 언론에 “(이 싸움은) 용맹을 시험하는 전쟁놀이가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소수민족의 비애”라고 말했다. 한인의 미국 내 입지는 과거보다 월등히 높아졌는데 여전히 비주류 분쟁의 도구로 쓰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한인의 비애는 끝나지 않았다.

고세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