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선거철마다 언론은 후보들의 지지율뿐 아니라 비호감도까지 집요하게 조사한다. 대선 후 한 매체는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에게 투표한 2030 남성의 목소리를 전했다. “반드시 지지해서가 아니라 나머지 후보가 별로라 뽑았다”는 고백이었다. 일부 국민은 가장 덜 비호감인 후보를 마지못해 선택했다는, 씁쓸한 해석이 가능하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린스턴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리더에 대한 평가에서 ‘매력(attraction)’이 결정적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매력을 자동적으로 감지하고, 이는 판단 전반에 깊이 영향을 미친단다. 여기서 말하는 매력은 보여지는 외모가 아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즉 타인을 자연스럽게 향하게 만드는 내면의 흡인력이다.
‘끌고 가려는 리더’와 ‘끌어당기는 리더’는 언뜻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권위를 앞세운 통솔형 리더다. 칼을 찬 장군처럼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한다. 군사정권이 그랬다. 그들에게 국민은 함께 가는 동반자가 아니라 다뤄야 할 대상이었다. 반면 ‘끌어당기는 리더’는 다르다. 억지로 몰아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 흡인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를 떠올리면 단서가 보인다. 그는 2000여년 전 마이크 하나 없이 수만명을 모았던 인물이었고, 누가복음 12장에는 ‘무리 수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강압이나 세속적 권력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몰려들었다. 왜였을까.
마가복음 1장에 그 실마리가 있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며, 당시 철저히 사회에서 격리되던 한센병환자를 만난다. 당시 한센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율법은 그들을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자로 낙인찍었다. 그래서인지 한센병환자는 부축하는 가족이나 친지도 없이 홀로 예수를 찾아왔다. 예수는 그런 환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다. 율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세상과 신에게 모두 버림받았다고 믿어온 바닥 인생에게 예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따뜻하게 손잡는 일이었다. 기적 뒤에 숨겨진 치유의 진실은 바로 공감이었다.
예수는 치유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신신당부했건만 치유받은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 성서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끌어당기는’ 예수의 리더십 서곡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
매력을 발휘하는 리더는 언변이나 허황된 약속으로 사람을 끌지 않는다. 억지로 끌고 가려는 리더는 결국 구성원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진짜 끌림은, 버림받은 자의 고통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공감의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매력은 곧 치유이고, 치유가 사람들을 묶어낸다.
언론 매체는 하나같이 시급한 대통령의 당면과제가 국민 통합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도 24분간 진행된 선서식에서 ‘통합’을 다섯 차례나 언급했다. 선서식 이후 국회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손을 잡는 대통령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통합은 온 국민 모두를 같은 생각과 이념으로 하나를 만드는 과업이 아니다. 힘이 없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국민을 먼저 살피고 이들을 품는 일이 최우선되어야 한다.
이 아침, 나는 기도한다. 힘으로 앞서가려는 대통령이 아니라 음지로 다가오는 대통령이길. 말보다 가슴으로 공감하고, 확고한 이념보다 억울한 이에게 먼저 손 내미는 그런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미래를 따뜻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의 리더가 우리 앞에 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