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회사에서 일하는 40대 A씨는 최근 팀장으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험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유했다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경찰은 5개월간의 수사 끝에 “비방 목적이 보이지 않고 내용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A씨는 그러나 “수사 결론이 나오기까지 금전적·정신적 피해가 너무 컸다”고 토로했다.
온라인상에서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상대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 사건의 70% 이상이 경찰의 불송치 결정으로 종결된 것으로 파악됐다. 매년 1만건 이상의 사이버 명예훼손 관련 고소가 쏟아지고 있지만 상당수는 범죄 혐의가 성립 안 된다고 판단되거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경찰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셈이다. 사이버 명예훼손을 규정하는 정보통신망법 조항의 모호성이 고소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10일 국민일보가 경찰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접수된 고소장은 1만1949건(잠정)으로 집계됐다. 2020년 9140건에서 2021년 1만1354건으로 늘어난 이후 계속해서 연 1만건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기준 2957건이 검찰로 송치된 반면 불송치 처분 건은 72.7%인 8692건에 달했다.
쏟아지는 사이버 명예훼손 고소에 비해 혐의가 인정되는 비율이 낮은 이유로는 우선 모호한 법적 기준이 꼽힌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했느냐에 따라 처분 결과도 천차만별”이라며 “비방의 의도가 있는지, 공익적 목적이 있는지 등까지 고려하면 변호사조차 유무죄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명예훼손 성립 여부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니 ‘우선 고소하고 보자’는 심리가 크게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혐의가 성립될 여지가 크지만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어 수사가 중지되는 일도 잦다. 2020년부터 매년 3000건 안팎의 명예훼손 사건들에 수사 중지 결정이 내려진다. 대부분 이용자의 인적 정보를 얻기 어려운 구글·유튜브 등 해외 플랫폼에서 발생한 일로 추정된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살인이나 거액의 횡령 같은 중대 범죄가 아닌 이상 해외 수사당국에서 속도감 있게 공조해주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사이버 명예훼손 고소 사건이 수사기관에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지적도 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온라인상의 단순한 시비나 말싸움 같은 사건에서 상대에게 보복하거나 압박을 가하려는 사적 목적으로 사법 자원을 이용하는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이버 명예훼손의 성립 요건을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이 더 적극적인 예방책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교수는 “온라인 플랫폼상에서 명예훼손성 발언이 일어나도록 용인하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도록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