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본능적 연민과 목욕 봉사

입력 2025-06-11 00:32 수정 2025-06-11 00:32

동물의 행동이 감동을 줄 때가 있다. 굶주린 새끼를 먹이는 어미 새의 모성, 동료의 상처를 핥는 늑대의 행동, 죽은 짝을 떠나지 못하는 수컷의 모습. 모두 본능적 행위다. 그런 행동들은 인간애와 유사한 감정적 공감이 동물에게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본능적 행동이 감동적인 것은 높은 지능과는 무관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적인 행위는 어쩐지 이치를 따진 후에 나오는 행동처럼 여겨진다.

감정적 공감이 본능적이라는 것에서 인간도 다르지 않다. 인간애는 원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능은 폄하할 속성이 아니다. 본능 속에도 고귀함이 장착돼 있다. 본능은 특히 죽음 앞에서 활성화된다. 질병, 기아, 전쟁 속에서 인간애가 피어난다. 인간을 파괴하는 전쟁 속에서 인간애가 싹튼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들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 원초적 인간애가 나타난다.

호스피스 병동의 자원봉사자들이 환자의 몸을 씻기는 모습에서 인간애를 보게 된다. 나약해진 환자의 여린 팔과 뼈가 드러난 등을 닦아주는 것은 원초적인 돌봄이자 고귀한 인간애의 발현이다. 호스피스 병동은 여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환자를 돌보지만 특히 봉사자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의 노고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단순한 간병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모든 힘이 소진돼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의 몸조차 씻을 수 없는데, 씻지 못한 몸은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병든 몸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도 수치스럽다. 이때 목욕은 단순히 청결을 유지하는 수고 이상을 요구한다. 환자는 수치심을 내려놓고 봉사자는 연민과 존중의 태도로 임하는 섬세한 과정이어야 한다.

몸은 한 사람의 배타적인 경계다. 남의 신체를 씻는다는 것은 경계를 넘는 진지한 행위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을 때 이 경계를 넘어간 것이다. 환자의 육체적 나약함으로 인해, 그리고 나약함에 반응하는 봉사자의 연민으로 인해 몸이라는 경계가 열린다. 죽어가는 피부에 손을 대고 타인과 접촉한다는 것은 목욕을 어떤 지적인 행위보다 고귀하게 만든다. 손에 닿은 앙상한 피부는 우리 모두의 피부이자 죽음이다.

이것은 죽음 앞의 교감이자 죽음에 대한 교감이다. 죽어가는 환자와 현재의 봉사자 그리고 미래에 언젠가 죽게 될 봉사자 자신이 목욕이라는 행위로 죽음에 대해 교감한다. 죽어가는 당신이 불쌍하고 언젠가 죽는 나 자신이 불쌍하다. 목욕은 이중의 연민으로 행해지는 의례이자 시간을 달리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교감하는 의례다. 씻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인간이 처한 곤경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것을 치유한다. 인간은 죽음에 맞닿아 있을 때 서로에게 가장 맞닿아 있다.

결국 우리는 치료가 아닌 돌봄으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분변을 받아내고 곪은 상처를 닦고 앙상한 몸을 씻기는 행위들이 일상을 채울 것이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지만 죽기 전에는 체면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아픈 사람은 부끄럽지 않다. 연민의 시선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인간 동물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다.

생기가 사라지고 자존감이 수명을 다하는 곳, 삶이 저물어 가는 곳에서 인간애가 솟아난다. 어쩌면 그곳이 진정한 인간애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다. 죽음 앞에서 환자도, 돌보는 자도 서로에게 인간이 된다. 뛰어난 지성이 아니라 한 마리의 어미 새 정도 지능만 가졌다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미 새 정도의 연민도 가지지 못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