쩡판즈 작품 이후 1년 감감… “무늬만 물납제 활성화해야”

입력 2025-06-11 00:00
지난해 6월 상속세 물납제 1호가 탄생했다. 미술품을 대거 상속받은 상속인이 세금 대신 내겠다고 신청한 작품 10점 중 4점이 심의위원회를 통과해 국립현대미술관에 입고됐다. 사진은 이 제도 덕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으로 소장하게 된 중국 현대미술 작가 쩡판즈의 ‘초상화’(2007, 린넨에 유채, 220×145㎝) 남녀 2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지난해 10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대형 회화 4점이 입고됐다. 상속받은 미술품에 대한 세금을 현금으로 납부하기 어려운 경우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낼 수 있도록 한 ‘문화유산·미술품 물납제’의 첫 사례다. 세무 당국은 앞서 그해 6월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 회의를 거쳐 상속인의 물납 신청을 수용했다.

이만익의 ‘일출도’(1991, 캔버스에 유채, 333×172㎝).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입고된 작품 중 가장 주목받은 건 2007년 한국 미술시장 호황기에 갈채 받던 중국 현대미술 스타작가 쩡판즈(61)의 ‘초상화(Portrait)’ 2점이다. 정장 입은 남녀 각각의 초상을 세로 2m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담은 ‘쌍둥이 회화’다. 둘 다 2023년 4월 K옥션 경매에 나왔다가 유찰됐다. 당시 추정가는 11억5000만원∼15억원. 최저 추정가로 쳐도 두 작품을 사려면 23억원이 든다. 해외 작가 작품이 빈약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작품 구매에 애를 먹던 국립현대미술관은 물납제 덕분에 쩡판즈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장할 수 있게 됐다. 이밖에 ‘토속적 서양화가’로 꼽히는 이만익(1938∼2012)의 ‘일출도’, 한약 봉지를 연상시키는 독창적 오브제를 캔버스에 붙인 작품으로 미술시장 블루칩으로 꼽히는 전광영(81)의 부조 회화 ‘집합 08’이 포함됐다.

그러나 미술·문화유산계 안팎에서는 두 번째 사례가 나올지 회의적 반응이 적잖다. 왜 그럴까. 물납제 첫 사례가 나온 지 1년에 즈음해 문화유산과 미술품 물납제에 대해 점검해보려 한다.

#물납제 도입 급물살 계기는

2020년 5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금동여래입상’(통일신라시대), ‘금동보살입상’(삼국시대) 등 보물 불상 2점을 내놓은 게 기폭제가 됐다. 각각 추정가는 15억원.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 12조에 따르면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는 상속시 비과세된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다른 유산의 상속세 등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소하려고 소장 중인 보물의 매각을 시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문화유산 지킴이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은 2018년 장남 전성우가 타계한 이후 장손 전인건으로 이어졌다. 두 보물은 당시 경매에서는 유찰됐지만 석 달 뒤 국립중앙박물관이 인수했다.

2020년 10월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타계하면서 그가 수집한 천문학적 액수의 미술품 컬렉션을 두고 상속세 물납제 확대 논의가 정부와 민간 양쪽에서 불붙었다. 당시 현금이 아닌 물납은 유가증권과 부동산에 대해서만 허용됐다. 이에 화랑협회는 물론 전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들까지 나서 상속세의 문화재·미술품 물납제 도입을 촉구했다. 이처럼 2020년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상속세 물납 범위를 미술품과 문화유산으로 확대하는 법 개정 작업은 초고속 진행됐다. 2021년 12월 21일 ‘상속세법 및 증여세법’에 관련 조항을 신설하는 법 개정(제73조2)이 이뤄졌고, 2023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적용 대상은 얼마나 될까

물납제 법제화를 가속화한 이건희 컬렉션 기증 뒤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는 모습. 국민일보DB

물납제 1호 사례의 주인공이 된 피상속인 A씨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쩡판즈 작품 외 전광영의 비슷한 작품은 1억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된 전례가 있고, 이만익의 작품 역시 이보다 작은 크기가 69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4개 작품 모두 합치면 20억∼30억원이 된다. 게다가 상속인은 애초 총 10점의 미술품에 대해 물납을 신청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미술품을 유산으로 남긴 컬렉터라면 슈퍼 컬렉터가 분명하다. 미술계 주변에서는 A씨에 대해 “건설회사, 골프장 등을 거느린 자산 수조원대 기업인”이라는 말이 돈다. A씨 역시 수집가 이건희처럼 미술관 건립을 염두에 두고 미술작품을 수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슈퍼 컬렉터뿐 아니라 중산층 컬렉터도 물납제의 잠재적 수혜자이다. 미술품·문화유산에 매겨진 상속세 납부세액이 2000만원을 초과하면 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상속받은 금융재산으로 상속세를 충당하기 어려운 경우에 한해 미술품으로 받는다. 수집가뿐 아니라 미술 작가들 역시 고가의 작품을 자녀에게 상속하기도 해, 이들의 자녀 역시 작품으로 세금을 내겠다고 신청할 수 있는 후보군에 들어간다.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같은 현대미술 대가의 유족 역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1호 탄생 1년이 돼 가도록 2호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제도 활성화” 다양한 목소리

시행 초기 단계라서 미술품 물납제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부족하다. 제도 활성화를 위해 전담 TF를 만들고 세무서 대상 교육·홍보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화랑협회 관계자는 “기획재정부,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 관련 주무부서에서 차출해서 TF를 꾸리고, 세무서에서 납세자로부터 물납제 신청을 받으면 TF로 업무를 이관하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상속세에 한정한 적용 대상 세금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정준모 공동 대표는 “현재의 물납제도는 흉내만 낸 반 토막짜리”라며 “문화선진국처럼 물납의 범위를 확대해 상속세는 물론 증여세, 재산세도 물납을 허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재정 당국은 세수 감소를 걱정하지만, 현재 국공립미술관 작품 수집 예산이 국고 또는 지방비라는 점에서 수집예산을 줄이고, 물납을 확대하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진국은 어떤가

선진국도 운영 방식은 제각각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술품과 문화유산의 물납제는 1968년 프랑스에서 비교적 먼저 시행됐다. 프랑스는 상속세뿐 아니라 재산세, 증여세 등 다양한 세금에 이를 적용하고 있다. 덕분에 피카소 사후 유족은 그가 남긴 미술품을 상속세로 대신 낼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국립 피카소미술관이 탄생했다.

1984년 물납제를 도입한 영국도 상속세에 한해 물납제를 시행한다. 일본에서도 1985년부터 상속세에 물납제를 도입했는데, 국보·보물 등 등록문화유산 제도와 연계한다는 게 특이하다. 한국으로 치면 국보나 보물 등 중요문화재를 상속받았을 때 이걸로 세금을 대신 낼 수 있게 허용하고 있다.

#미술관·박물관의 입장은

무엇보다 물납 대상 문화유산 및 미술품은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 심의에 참여한 전문가들도 이 부분을 가장 고려해 심사했다고 했다. 또 다른 고려 사항은 활용도다. 컬렉터 A씨의 상속인이 세금 대납을 신청한 10점 중 6점이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이 기준에 맞지 않아서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작품은 모두 좋았다. 하지만 미술관으로서는 전시 등을 통해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일부 미술품은 너무 크고 무거워 전시 활용도가 굉장히 낮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또 수장고 보관 비용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6점 중에는 벽화를 연상시키는 대형 회화, 설치 미술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