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개와 늑대의 시간

입력 2025-06-11 00:35

저녁 8시. 밖이 여태 밝은 걸 보니 여름이 바짝 다가왔구나 싶다. 지난해 여름의 폭염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혹독했기에 이번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해 질 무렵의 어스름한 빛이 세상을 곱게 감싸는 모습에 금세 마음이 홀렸다. 다홍색과 군청색이 뒤섞인 황혼빛은 먼 산과 도로, 높고 낮은 건물들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물들였다. 퇴근길 도시의 풍경이 무척이나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여 일상의 자잘한 근심까지 잊혔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전, 이 황혼의 시간을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부른다. 멀리서 달려오는 동물이 자신이 키우는 개인지, 자신을 해치려는 늑대인지 분간이 안 간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이런 어원에 따라 아군과 적군,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알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하루에 한 번 찾아오는 어스름의 시간처럼, 인생에도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시절이나 혼란한 사건을 겪는 시간이 있다. 세상의 질서에 반항하면서도 현실에 발을 떼지 못하는 청춘이 그러하고, 믿었던 사람이 신의를 저버린 순간도 그러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만 깊어지는 날들도 개와 늑대의 시간에 속한다.

우리가 개와 늑대의 시간을 마주해야 하는 건,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 속을 건너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확신 없는 결정을 내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본질을 깨치고, 사유와 성찰을 거듭하며 삶으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한 가닥의 지혜를 더하고 한줌의 초연함을 보태며 아침을 기다리는 거라고. 지금의 어스름이 지나 다시 해가 떠오르면 그 시간 속에 머물렀던 내 모습이 선명해질 것이다. 그 시간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알게 되면 마침내 이렇게 말하겠지. 개와 늑대의 시간은 인생의 귀한 여정이었다고. 쉽지 않았지만, 황혼빛으로 찬란한 인생이었다고.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