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제일교회에서 새 교회당을 신축하고 입주 예배를 드린 후, 나는 휴식도 취할 겸해 사단법인 두란노가 주관한 목회자 연수 프로그램에 합류해 미국의 대형 교회와 기관을 방문하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 중 대전신학대 이사회에서 나를 총장으로 청빙하기로 내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당시 학교 이사 중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미국으로 가기 전 고향인 대전에 가서 정행업 총장님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그는 불쑥 자기 후임으로 이 학교 총장을 맡아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문 목사님, 제가 은퇴를 해야 하는데 후임 총장으로 오셔서 이 학교를 맡아주세요.” 정 총장님은 ‘아리랑 신학’ 등의 책을 저술했고 토착화 문제에 관심이 많은 신학자였는데 내가 교회음악과 예배를 한국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며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사랑해 주셨다.
나는 정 총장님에게 정중히 사양하고 자격이 없음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미국을 가야 하니 이사들을 만나면서 청빙을 받기 위한 운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했다. 정 총장님은 일단 미국에 가라고 하며 여기에서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노라고 했다.
당시 대전신학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각종학교’ 상태에서 정식 인가를 위해 필요한 건축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학교는 돈이 없었고 비전도 없었다. 이사회는 학교 이전을 계획했으나 이것도 쉽지 않았다. 이사회는 당면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임 총장은 학자적 실력과 더불어 교회 목회를 5년 이상 한 경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정 총장님은 나를 조건에 맞는 적임자로 보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귀국할 때까지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려운 학교를 정상화시키고 건축을 시작할 자신도 없었고 총장이라는 자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광주제일교회는 신도시 한복판에 있는 유일한 교회였기에 누가 목회해도 잘 될 교회였다. 그러나 대전신학대는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이 학교를 살리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인위적인 노력 없이 순리적으로 주어진 이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학교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나는 대전신학대의 총장이 되었으니, 내가 총장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사회는 2000년 5월에 나를 총장으로 공식 내정했다. 나는 같은 해 8월까지 광주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이어갔다. 내 사임이 확실해지자 당회는 서기를 통해 나에게 후임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건은 정치하지 않고 목회만 잘할 목사님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이었던 백경홍 목사를 추천했고 당회가 이를 받아 후임을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 교회가 5년밖에 목회하지 않은 나에게 후임자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 것과 백 목사를 후임으로 택한 것은 그만큼 나를 신뢰해 준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