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수준 시스템 갖췄으나
기존 모델 한계 명확히 드러나
삶의 주체로 회복될 수 있도록
사회적 연결 중심으로 진화해야
단순한 급여 확대 머물지 말고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 도와야
기존 모델 한계 명확히 드러나
삶의 주체로 회복될 수 있도록
사회적 연결 중심으로 진화해야
단순한 급여 확대 머물지 말고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 도와야
한국의 복지체제는 흔히 ‘압축적 진화’로 요약된다. 후발 산업국으로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국가 역량을 바탕으로, 선진국 수준의 복지제도를 단기간에 구축한 유례없는 사례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또다시 전례 없는 거대한 변화 속에 서 있다. 초저출산과 초고령화, 1%대 잠재성장률, 미·중 패권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인공지능(AI) 자동화 혁명은 기존 수출·제조 기반 성장모델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 모든 조건은 복지를 포함한 국가시스템 전반의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자리 지형과 생활체계 변화는 복지정책에 중대한 함의를 던진다. 이는 단순한 고용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재생산 자체가 어려워지는 문제다. 고립, 정신건강 악화, 돌봄 수요 폭증, 부모와 자녀를 동시에 부양해야 하는 이중 부담은 개인 삶을 점점 더 마모시키고 있다. 이처럼 복합적인 위험에 직면한 사회에서 기존의 ‘소득상실 보전형’ 복지 중심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뚜렷하다. 이제 복지는 안전과 안심을 넘어 회복탄력성과 사회적 연결을 중심에 두는 제도로 진화해야 한다.
첫째, 복지체계는 회복탄력성을 지원하는 ‘역동적 구조’로 전환돼야 한다. 복지의 성과는 단순히 ‘급여를 지급했는가’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 회복되었는가’에 있어야 한다. 자기주도적 회복이 가능한 사람에게는 AI 기반 생애설계도구, 복지 지갑, 복지 마일리지 등 디지털 기반 서비스를 통해 맞춤형 자기설계형 복지를 지원해야 한다. 자기방임 상태의 수급자에게는 전문복지 인력의 심층 개입과 사례관리 시스템을 통해 자기돌봄 역량 회복을 돕는 이원적 구조가 필요하다. 이는 기술기반 복지행정 혁신과 전문인력 집중 투입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때 복지는 생존보장을 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문적 실천’으로 고도화돼야 한다.
둘째, 노동시장과 연금체계의 동시적 개혁으로 세대 간 자원배분의 공정성을 높여야 한다. 고령자의 경제활동 선택권을 존중하되 청년층의 고용기회를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년연장과 재고용제도를 유연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노인 연령기준의 단계적 상향조정, 고령자 맞춤 노동시장 재설계, 지속가능한 연금 개혁 로드맵 마련, 다층연금체계 정비는 세대 간 부담과 보장 간 균형을 회복하고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장치가 될 것이다.
셋째, 건강돌봄체계는 지속가능성과 사람 중심 원칙에 입각해 재설계돼야 한다. 고비용의 요양병원 중심 구조를 재가 중심의 유연하고 충분한 돌봄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요양병원의 구조조정과 간병비 부담 완화를 동시에 추진하고, 지역 기반 통합돌봄 인프라를 확충해 주거·의료·돌봄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사람 중심 돌봄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처우개선을 통해 돌봄인력의 지속가능한 재생산을 보장하는 정책도 마련돼야 한다.
넷째, 중앙정부의 표준화된 생계보장을 넘어 지역 단위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위험관리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자율성과 책임을 갖고 ‘재량기금’을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강화돼야 한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는 일률적 제도 설계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현장 중심의 신속한 대응과 긴급개입이 가능하도록 지역복지 집행력을 높이는 전환이 필요하다.
다섯째, 복지는 ‘관계의 빈곤’이라는 새로운 빈곤에 대응하는 제도가 돼야 한다. 고립과 단절이 심화되는 개인화 사회에서 ‘사회적 연결’은 새로운 복지 기준이 된다. 고립된 이들에게는 ‘누군가 나를 알고 있다’는 감각이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할 복지서비스이며, 관계 복지는 단순한 방문이 아닌 신뢰와 책임의 구조를 복원하는 과정이다. 관계 복지는 정서적 안정과 사회적 소속감을 회복시키는 개인화 시대 복지국가의 핵심 기반이 돼야 한다.
복지국가의 진화는 보편성에서 개별성, 유연성, 회복성, 관계성으로 확장돼야 한다. 한국의 복지체제는 이제 단순한 급여의 확대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과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복지는 삶의 안전망을 넘어서 삶의 역동성을 회복시키도록 돕는 능동적 재도약의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설계해야 할 미래 복지국가의 핵심 방향이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
사회복지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