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공책의 첫 페이지

입력 2025-06-09 00:34

어딘가 고이 모셔둔 서류를 찾느라 자주 열지 않던 수납함을 열었다. 한 켠에는 그간에 선물로 받은 공책들이 쌓여 있었다. 온갖 나라의, 온갖 크기의, 단정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온갖 디자인의 공책을 다시 크기별로 정리했다. 또 그 옆엔 온갖 연필이 모아져 있다. 모두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이대로 지내다간 이번 생애에 이걸 다 쓰지 못하게 되리란 생각이 스쳐갔다.

글쓰기를 하기 전에 연필부터 뾰족하게 깎아두던 습관, 공책 위에 연필이 마찰의 힘으로써 문장을 만들 때 들려오던 사각사각하던 소리, 어떤 종이와 어떤 흑연이어야 내 필체가 조금이라도 나은 느낌을 빚는지를 까다롭게 측정하던 오랜 버릇, 공책의 왼쪽 면을 쓸 때보다 오른쪽 면을 쓸 때에 한결 편안한 느낌을 갖던 마음, 아무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때 가장자리에 아무 의미 없이 그려 넣은 낙서 같은 그림들, 써둔 초고를 다시 옮겨 적고 또다시 옮겨 적으며 시를 직조하던 숱한 밤들. 이미 다 쓴 공책들 속에는 지난날에 내가 썼던 문장들 외에도 온갖 감각들이 함께 보존돼 있다. 파삭하게 마른 들꽃이나 네잎 클로버 같은 것이 끼워져 있기도 하다.

공책을 매일매일 꺼내 무언가를 적던 때 나는 공책을 좋아했다. 연필도 좋아했다. 다양하게 사용해보고 내게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내 즐겨 썼고 누군가에게 선물로도 건넸다. 공책에 애착이 있었고 그만큼 조예도 있었다. 지금 공책을 대신한 나의 핸드폰. 애착이 없이도 매일매일 손에서 놓지 않는 이 물건. 조예라는 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력만 커져가는 물건.

새 공책들 중에서 가장 얇은 것 하나를 골라 책상에 꺼내뒀다. 수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누군가 선물로 건네준 것이었다. 예전처럼 표지에다 오늘 날짜를 적었다. 게시 일자를 적어두는 것이다. 첫 페이지에 이 칼럼을 쓴다. 연필을 쥐고서. 연필 냄새를 맡으며.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