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성모 (11) 광주제일교회 섬기며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 목회

입력 2025-06-09 03:04
문성모 목사가 광주제일교회의 예배당을 이전해 신축을 마친 1999년 11월 진행한 새성전 신축 기공식 포스터. 문 목사 제공

호남신학대에서 2년 동안 강의를 하고 있을 때 1995년 광주제일교회의 한완석 목사가 은퇴하며 당회가 나를 후임 목사로 결정했다. “문 목사님을 저희 교회 후임 목사로 모시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청빙위원장 이승필 장로님의 연락을 받고 어리둥절했다. 학교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일어난 뜻밖의 결정이었다. 당시 나는 광주제일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몰랐다.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은 내가 그 교회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2년 전 귀국하면서 목회를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늦은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41세, 젊은 목사였으니 100년 전통의 광주지역 모(母) 교회를 맡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했다. 광주제일교회 제14대 목사로 부임하기 한 달 전 아들 은성이가 광주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다.

교회 목사로 나는 ‘예배와 음악의 한국화’를 목회 현장에서 실천했다. 절기 예배가 특별해지고 한국 악기와 가락이 추수감사예배에 등장했다. 광주제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3·1운동 기념예배와 광복절 기념예배에서 내가 제작한 특별 순서에 의해 드려졌다. “목사님, 한국적인 예배가 너무 좋아요. 예배 시간에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른 경험은 처음입니다.” 교인들은 호기심에서 시작해 감동으로 예배를 마쳤다.

나는 교회의 사명이 나눔과 헌신에 있다고 믿었다. 교회에는 광주고법 부장판사인 맹천호 장로와 변호사 몇 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아 전국 교회를 상대로 무료법률상담실을 개설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실시하는 법률 상담에는 전국 각지에서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그 외에도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과 이미용 봉사, 사랑의 도시락 나누기와 급식 제공 등의 나눔 행사를 실시해 교회가 사회의 그늘진 곳을 돌아보도록 했다.

교회는 역사가 100년이 돼오지만 광주의 모교회라는 자부심에 매여 있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 중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우선 예배 중 특별석이었던 장로석을 없애고, 장로만 대표기도를 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권사와 안수집사까지 그 범위를 확대했다. 당회에 은퇴 장로들까지 참석하는 관행을 바로잡고 시무장로만으로 당회를 운영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의 기초는 말씀임을 강조했다. 나는 주일 수요 새벽 설교에 최선을 다하며 말씀으로 교회가 변화되기를 바랐다. 목회 5년 동안 점차 교회가 변화됐고 나 자신도 인간 이해라는 측면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목회하는 동안에 예배당을 신축하는 일도 있었다. 광주 상무대 신도시 종교부지에 5944㎡(1798평) 규모로 교회당을 새로 지었다. 건축을 준비하는 도중 IMF 경제위기가 닥쳤으나 무사히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때 건축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다음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