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강력한 대중국 수출 규제가 역설적으로 중국의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산업의 자립을 가속화하고 있다. 계속되는 미국의 제재에 해외 기업 칩에만 의존하던 중국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자급자족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어서다. 중국 시장에서 사라진 빅테크들의 자리를 자국 기업들이 빠르게 채우면서 전 세계 반도체 업계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5일 정보통신(IT)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최근 ‘중국 AI, 잠자는 거인이 깨어난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는 지난해 34% 수준이던 중국의 AI 칩 자급률이 오는 2027년 82%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강력한 반도체 수출 규제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 성장을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자립화 속도가 더뎠던 하드웨어 컴퓨팅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제재로 AI 구동의 핵심인 최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가 어려워지자, 중국 개발자들은 해외의 구형 GPU와 자국산 GPU를 혼합해 연산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의 저사양 칩인 H20 등을 대량 구매해 이를 병렬로 묶어 성능을 높이는 기술을 고도화했다.
모건스탠리는 중국 AI 기술력 성장의 가장 큰 동력으로 인재를 꼽았다. 중국은 약 11억명이 이용하는 모바일 앱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데, 해당 데이터는 AI 모델 학습에 필수다. 막대한 규모의 차이나 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몰리는 인재들도 점점 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자 중 47%가 중국인이거나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은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에서도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중국이 자국산 AI 칩과 핵심 부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면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고,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전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공급량의 30%를 담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이 자국 공급망을 활용해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 경우 제조 원가는 글로벌 공급망을 이용할 때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중국의 자급력 강화는 엔비디아의 실적에 타격을 주고 있다. 엔비디아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H20에 대한 대중 수출을 제한한 뒤 해당 분기(2~4월)에만 25억 달러(약 3조4500억원)의 매출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이 같은 상황이 지속하면 엔비디아에 부품을 납품하는 국내 기업들의 실적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