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이 별에 필요한’이 최근 공개됐다. 2050년 서울을 배경으로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김태리)과 뮤지션의 꿈을 잠시 접어둔 제이(홍경)가 만나 펼치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스물이다. 영화는 넷플릭스에서 처음으로 만든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으며 포브스 등 해외 매체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영화는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뉴웨이브’로 통하는 한지원(36) 감독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한 감독은 “한국에서 오랜만에 나온 성인 로맨스물이자 오리지널 작품”이라며 “이런 기회를 잡은 것 자체로 어깨가 무거웠고, 내가 잘해야 앞으로 업계에 더 많은 기회가 생기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밝혔다.
근미래의 서울과 화성이라는 우주 공간, 미래와 복고를 섞어놓은 화면과 음악이 이 영화만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한 감독은 “우주와 음악이라는 소재가 어우러진 이같은 정서의 작품을 예전부터 만들고 싶었다”며 “‘카우보이 비밥’ 같은 작품을 보면서 씨앗이 심긴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김태리와 홍경이 두 주인공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영화는 두 배우가 세트장에서 실제로 연기하는 장면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한 감독은 “이런 공정은 디즈니나 픽사 등 해외의 대규모 프로젝트에선 많이 하지만 국내에서 이렇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영화 감독처럼 촬영을 진행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이 작업 방식은 배우 각자가 자신의 해석으로 연기하면서 캐릭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내가 책상에 앉아서 그릴 수 있는 동작에는 한계가 있고, 캐릭터에 내 모습이 투영되는 경향성이 생긴다. 캐릭터가 당사자가 되는 ‘몰입’은 배우가 아니면 하기 어렵다”며 “난영과 제이가 싸우는 장면 같은 경우 그림으로 그렸을 땐 조곤조곤 싸우는 느낌이었는데 배우들과 리딩을 진행했더니 화가 나서 ‘제대로’ 싸우더라. 대본상으론 자연스러웠는데 막상 배우의 입에 붙여 보니 어색해서 바뀐 대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실사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라서 표현할 수 있는 장면들도 있었다. 난영이 향하게 되는 화성의 모습은 한 감독의 상상을 통해 아름다운 빛깔로 펼쳐졌다.
그는 “상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장면을 좋아한다. 살면서 꿈보다는 현실적인 선택을 강요받기도 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선 현실과 꿈을 교차하면서 그 둘을 같은 비중으로 보여줄 수 있다. 꿈을 응원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기도 하다”며 “우주가 나오는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귀띔했다.
이 영화에서 우주만큼 중요한 소재는 음악이다. 뮤지션 제이를 연기한 홍경이 직접 가창한 곡도, 김태리와 홍경이 함께 부른 곡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에 수록됐다. 한 감독은 “(음악에) 직접적으로 욕심냈다”며 웃었다.
그는 “박성준 음악감독과 함께 음악의 톤을 찾아나갔다. 지금 Y2K 감성이 주목받는 것처럼, 25년 정도로 유행의 순환주기를 가정했다”며 “2050년의 음악은 지금 우리가 듣는 음악과 비슷하면서도 신스팝이나 일렉트릭처럼 미래적인 느낌이 더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와 함께 한 ‘이 별에 필요한’ 작업은 그에게 커다란 경험이 됐다. 한 감독은 “이 정도 규모의 작품을 처음 해봤다. 이전에는 모든 걸 혼자서 붙잡고 있었다면, 과감히 다른 팀원에게 일임해야 하는 부분과 내가 꼭 개입해야 하는 부분을 구별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태도가 필요했다”며 “매 공정 팀원들과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대화로만 되지 않는 부분은 그림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재밌기도, 어렵기도 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전 세계에 내 작품을 선보인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감독은 “애니메이션 업계에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등장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기존 방송 채널보다 성인향 애니메이션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며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에 투자한다고 했을 때 기적이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성취 중 가장 큰 것 같다”고 했다.
이어 “무엇보다 사람들이 여러 언어로 작품을 본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외국 성우들이 더빙한 버전을 들었을 때 김태리와 홍경이 해석한 연기에 나라별 문화가 반영돼 나오는 조합이 흥미로웠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할머니가 운영하던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며 꿈을 키운 한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2010년 ‘생각보다 맑은’으로 제6회 인디애니페스트 ‘인디의 별’(대상)을, 2018년 ‘딸에게 주는 레시피’로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 애니메이션 대상을 받은 그는 지금 업계의 촉망받는 기대주다.
한 감독은 “중학교 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를 보고 충격받았다. 그때까지 알던 애니메이션과 달랐고, 나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고, 이 업계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나가는 건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는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함께 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와 벌써 차기작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한 감독은 “이번 작품은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녹아들었는데, 다음 작품은 본격 장르물이다. 크리처가 등장하는 다크 판타지”라며 “장르적 색채가 강조되면서도 캐릭터에 대한 개성있는 묘사, 특히 심리에 대한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묘사가 들어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포부를 묻자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한 감독은 “어려운 환경에서 기적적인 기회를 얻었다. 이 기회의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는 게 가장 큰 목표”라며 “국내 상업 애니메이션 시장에 다양한 색채와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고, 나도 그중의 하나가 되길 바란다. 글로벌 OTT에서 오리지널로 공개된 첫 사례가 이제 나왔으니, 더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기회로 이어지도록 시청자들이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