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재 경제 상황이 과거 1990년대 초반의 일본 버블경제 붕괴 전후와 닮았다는 분석이 한국은행에서 나왔다. 특히 국내총생산(GDP)에서 민간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이 일본의 버블기 최고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과감한 구조 개혁과 혁신이 없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우리가 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은 5일 ‘BOK 이슈노트: 일본경제로부터 되새겨볼 교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고 “버블 붕괴 전후의 일본은 부채·인구·기술 세 측면에서 구조 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오늘날 한국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먼저 한은은 한국의 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이 2023년 207.4%로 1994년 일본 버블기 최고 수준(213.2%)과 비슷하다며 철저한 관리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민간부채 구조를 봤을 때 경제에 충격이 가해졌을 경우 한국이 더 큰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조업보다 생산성이 낮은 부동산업으로 자금이 과도하게 쏠리고 있어 자원배분 왜곡 우려도 크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민간부채 가운데 가계부채 비중은 45%로 버블기 일본(32%)보다 더 가계에 편중돼 있다. 부동산 업종에 대한 대출집중도 지수는 3.65로 일본의 버블 붕괴 직후 수준인 1.23의 3배에 달한다.
보고서는 인구구조 문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짚었다. 일본에선 생산연령인구가 1995년, 총인구가 2009년을 정점으로 줄었다. 한국의 경우 생산연령인구가 2017년, 총인구가 2020년 이후 감소하기 시작했다. 저출산·고령화 상황은 비슷하지만, 일본보다 한국의 속도가 가파르다.
한은은 유휴 인력의 생산 참여 확대, 혁신 지향적 교육 투자 강화 등으로 노동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산율을 단계적으로 높이는 노력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은은 “만약 일본이 인구구조 변화에 적절히 대응해 2010년부터 인구가 줄지 않았다면, 2010~2024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6% 포인트 상승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한국도 출산율 제고, 노동의 질 개선 등이 이뤄진다면 성장률 하락의 상당 부분을 만회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와 함께 한은은 강력한 성공 경험이 구조 개혁을 추진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성공전략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시장 상황의 변화에도 기존의 수직계열화와 선진국 중심의 시장 전략을 고수했었다. 이는 산업 경쟁력과 국내 생산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은은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첨단산업 육성에 역량을 모으고 고부가가치 서비스 수출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장태윤 한은 조사국 물가동향팀 과장은 “통화정책은 경기 대응 수단이지 경제체질 개선 수단이 아니다”면서 “우리 사회가 구조 개혁에 보다 전향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통화정책 운용도 더욱 제약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