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직후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이 자신의 뉴딜 정책에 잇따라 위헌 판결을 내리자 보복 조치에 나섰다. 연방대법관 정원을 9명에서 15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제출했다. 명분은 ‘대법관들의 업무 부담 경감’이었으나 속내는 대법관 물갈이였다. 1789년 독립 당시 6명이었던 대법관 숫자는 1869년 9명으로 늘어난 이후 변화가 없었다. 미 본토의 영토가 확장되고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법률 수요가 폭증했지만 대법관 증원만큼은 미 의회가 신중을 기했다. 사법부의 독립과 중립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법관 물갈이 시도는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에 부딪쳤다. 미 상원은 청문회를 질질 끌다가 법안을 폐기시켰다. 이후 대법관 증원 시도는 없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대법관 정원을 단기간에 급격하게 늘린 나라는 없다. 남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대법원 장악 의도로 대법관을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린 적이 있는데, 그가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대법관 정원은 대법원장 포함 14명이다. 1948년 초대 대법원의 11명에 비하면 3명 늘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 국력 신장에 비하면 미미한 증가다.
국회에서 여야가 뒤바뀐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대법관 정원을 놓고 격돌하고 있다. 민주당이 대법관을 3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법사위 소위에서 통과시키자 국민의힘은 ‘이 대통령의 약속 위반’이라며 반발했다. 대법원은 ‘사법부 중립의 심각한 위협’이라며 반대의견을 냈다. 의아한 것은 일반 판사들의 침묵이다. 대법원의 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에 대해서는 전국법관대표회의까지 소집했던 판사들이 국회의 대법관 증원 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다. 대법관 증원이 사법부 독립과 무관하다고 판단하는 건지, 재판 지연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는 건지, 입을 닫고 있다. 왜 그럴까.
전석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