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주장과 명쾌한 설명
없지만… 내가 찾은 애틋함
전달하는 그런 글 쓰고 싶다
없지만… 내가 찾은 애틋함
전달하는 그런 글 쓰고 싶다
쓰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한 시간째 끙끙 앓으며 쓴 문장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어느새 포털의 뉴스 기사들이 워드 화면을 덮친다. 삶을 뒤흔들 만큼 분노할 일이 어째서 이토록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정치면, 사회면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내 글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놓치기 쉬운 삶의 흔적과 다시 오지 않는 순간, 세계의 가장자리를 말하고 싶었는데….
모두 무용한 일이 아닐지 의심이 든다. 창작자에게 무기력을 동반한 의심은 독과 같다. 그러니 지금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혐오의 발언으로 얼룩진 세계가 아니라, 나를 넘어뜨리는 이 의심일 것이다.
뉴스 창을 닫고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진다. 컴퓨터 배경 화면에 외딴섬처럼 떠 있는 폴더를 연다. 그곳에 오늘 실패한 문장들을 저장한다. 수백 개의 파일이 있는 그 폴더의 이름은 ‘블랙박스’. 그 안에는 꽉 막힌 도로처럼 정체된 문장, 사고 난 차량처럼 조각난 문장, 구멍 난 타이어처럼 주저앉은 문장, 길 잃은 문장이 있다. 그렇다. 그 블랙박스 안에는 나의 모든 실패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언젠가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실패한 글들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지우기에는 노력과 시간이 아까웠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한 번 실패한 글은 처음 의도대로 회복되지 않았다. 내게 글쓰기는 어떤 시점에서의 감각과 응시이기에 그때의 시간성을 되찾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블랙박스 속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것을 쓴 나는 이미 어떤 시간을 지나쳐 버렸으니까.
그러니 내가 실패한 그 문장들로부터 무언가를 쓴다면 그것은 이어 쓰기가 아니라 다시 쓰기여야 하지 않을까. 이때의 ‘다시’는 변주를 향한 반복이어야 한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지만 이전의 것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해보는 것.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생산하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쓰기, 그것은 최초의 의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통과한 내가 지금의 언어로 새로운 궤도를 그려보는 일이다.
다시, 나를 넘어뜨린 그 의심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내 글의 무용함을 똑바로 마주해 보자. 어쩌면 그것은 내 목소리가 선명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내 글은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견고한 명제나 해답을 담는 일도 별로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기보다 쓰면서 발견하고 알아가는 사람에 가깝고, 모르는 것을 말하며 질문을 만들고, 지식이 아닌 감각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저무는 태양과 누군가의 뒷모습, 가장자리를 맴도는 사람을 담으면서. 사는 일의 쓸쓸함과 어리숙함을 위로하고 나누면서. 그런 내가 어떻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날카로운 펜이 아닌, 적당히 닳은 연필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선명하지 않고 투박하나 언제든 틀린 것을 고칠 수 있는 그런 글을 쓴다면, 작게 말하는 내 글도 누군가에게 가닿지 않을까.
나의 무용한 글은 누군가를 바꾸거나, 타인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 내가 찾은 애틋한 것을, 아까운 것을 건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어떤 풍경과 마음과 이야기 안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다면…. 읽는 이에게 머무르는 일은 조금 더 보고, 조금 더 느끼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한 독서는 한자리에서 일어나는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보기, 아니 새롭게 보기. 한 번 본 것과 두 번 본 것은 같을 수 없으므로.
멈춘 문장으로부터 다시 쓴다. 실패를 반복하고, 그 반복을 통해 작은 변주를 이뤄내며 나아지는 것은 내 문장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나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반복하는 모든 실수와 실패를 다시 해보기. 그 무수한 반복을 통해 새로운 궤도를 그리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의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