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기독교 제국’ 열린 후에도 異敎 영향 컸다”

입력 2025-06-06 03:05
영국 요크에 있는 로마 제국 '첫 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동상. 위키미디어 커먼스

4세기 로마 제국의 속주 브리타니아(영국의 옛 지명)에 살던 안니아투스는 은화 여섯 닢이 담긴 돈 꾸러미를 도둑맞은 후 온천 도시 배스를 찾는다. 로마 여신이자 켈트족 여신인 ‘술리스 미네르바’의 성스러운 우물에서 도둑 검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그는 여신의 이름으로 도둑을 저주하기 위해 우물 곁에 놓을 납판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 군상을 모두 새겼다. ‘남자든 여자든, 소년이든 소녀든, 노예든 자유민이든, 이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그 누구든.’

로마 시대 당시 '술리스 미네르바'의 성스러운 우물이 있던 영국 온천 도시 배스의 유적지. 게티이미지뱅크

로마 제국의 ‘첫 기독교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4세기 밀라노칙령(313년)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러니까 안니아투스는 황제가 제국의 종교로 기독교를 공인하고 장려하는 상황에서도 토속 신앙을 유지한 셈이다. 후기 로마사 전문가인 저자 피터 브라운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석좌교수는 명실공히 ‘기독교 제국 시대’가 열렸음에도 기독교와 이교(異敎)가 혼재된 이 상황에 주목한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기독교인 황제의 권력과 그가 제정한 법률에 기인했다는 게 그간 역사학계의 정설이었다. 기실 이 통설은 5세기 기독교 사상가와 설교자, 역사가가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와 고대 다신교의 대결을 ‘천상의 싸움’으로 묘사했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제국서 득세하던 이교가 몰락한 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순간부터 예정된 것”이다. “수많은 이교 사원이 단숨에 흔적 없이 사라진 것도 그리스도가 천상에서 악의 세력에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라고 본다.

벨기에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입성'. 위키미디어 커먼스

저자는 이 간편하고도 초자연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역사의 민낯은 단순명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대신 그는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승리했다고 여겨지던 이 시기에 이교 관행은 금지됐지만 기독교 역시 유럽과 중동 지역에 살던 사람 대다수가 진심으로 받아들인 종교는 아니”라고 말한다.

일례로 저자는 5세기 이집트 콥트정교회 성인 셰뉴테의 일화를 든다. 셰뉴테는 로마의 한 속주의 총독과 접견하다 그의 오른발에 자칼의 발톱이 묶인 걸 본다. 그 이유를 묻자 총독은 “어느 위대한 수도사의 조언을 따랐다”고 답한다. 이는 명망 있는 기독교 수도사도 미신과 주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당대 현실을 보여준다.

기독교 제국이란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사례는 또 있다. 로마 상류층은 사냥 등 공공 연회를 열 때 고대 신에게 제물을 바치곤 했는데, 기독교 공인 이후엔 공물을 바치는 대상이 그리스도로 바뀐다. 로마 제국 후기 은식기 유물인 ‘세우소 보물’이 그 증거다. 10여개의 식기로 구성된 보물 중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양인 ‘라바룸’이 그려진 은접시가 있다. 그는 “기독교의 상징이 세상의 안정과 번영을 표현하는 기호가 된 것”이라며 “기독교 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설명한다.

로마 후기 유물인 '세우소 보물' 일부. 위키미디어 커먼스

기독교의 영향력이 이교를 압도했음에도 실생활에선 그 경계가 모호했던 현실을 모두가 받아들인 건 아니다. ‘고백록’ 저자로 서방 신학과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대표적이다. 관습에 스며든 이교 의식에 질색했던 그는 이교 신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제1요일’ ‘제2요일’ 식으로 요일 명칭을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습관 속 영성과 고결함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은 훗날 서방 교회의 주요 강령이 된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덕에 두 종교는 대규모 유혈 충돌 없이 서서히 기독교 제국에 흡수됐다. 저자가 로마의 기독교화를 ‘부드러운 폭력’ 혹은 “보편 교회가 소리 없이 보편 제국을 대체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다.

책은 이교의 영향력을 부각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역사에 두루 족적을 남긴 4~5세기 ‘기독교의 승리’를 흠집 내려는 것은 아니다. 역사, 특히 교회사 연구의 정밀함을 강조하는 책에 가깝다. “1000년에 걸친 기독교화 문제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이 책의 목적”이란 저자의 말이 이를 방증한다. 부록에 실린 그의 학문 여정에선 모든 연구에 완벽을 추구하는 대가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