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학교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목회부터 먼저 하고 싶습니다.” 나는 1993년 4월 귀국해 목회를 위한 기도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은 목회의 길을 막으시고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 교수로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거절하신 게 아니라 늦추신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가족을 데리고 귀국한 나는 집도 돈도 없는 처지가 돼, 할 수 없이 동서네 집에 방을 하나 빌려 임시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에서 신학과 조교수로 임용하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당시 교수로 있던 동기 노영상 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승룡 총장이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교회 목회 자리에 연연해 기다릴 처지가 못 됐다. 이렇게 해 귀국 후 첫 사역은 신학교 교수로 출발하게 됐다.
호남신학대는 신학과와 교회음악과가 있었다. 나는 실천신학 교수로 한국적인 예배와 음악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를 던지고 그 해법에 대해 학생들 스스로가 답을 찾도록 유도했다. ‘민족음악과 예배’라는 과목을 개설해 한국적인 예배와 찬송가에 대해 강의하고 토론했다. 학생들은 생소한 과목에 흥미를 느끼며 경청했다. 학생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성만찬을 위한 재료로 백설기와 수정과를 사용해 보기도 했고, 박동진 명창을 초청해 판소리 ‘예수전’ 공연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르친 내용을 모아 95년 ‘민족음악과 예배’라는 책을 출판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또 다른 면은 정직성이었다. 예배는 삶이고 설교는 삶에서부터 준비돼야 함을 가르쳤다. 한번은 ‘실물설교론’ 기말시험을 무감독 시험으로 치렀다. 수업 중 출석도 부르지 않았다. 나는 시험지 맨 위에 ‘무감독 시험에 대한 서약’과 ‘결석에 대한 양심선언’ 난에 각자 서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시험을 감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양심대로 정직하게 시험에 임하세요. 부정행위를 하고 A 학점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은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시험을 치른다면 그 사람은 평생 진정한 설교자로서 말씀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기도하고 교실에서 나왔다. 한 시간 후 과 대표가 시험지를 거둬서 내 방에 가져오며 “교수님, 한 사람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험은 처음입니다. 감동입니다”라고 전하며 울먹거렸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 학생과 함께 감사 기도를 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채점을 하다가 어떤 여학생이 답안지에 양심선언을 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저는 부정행위를 했습니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나는 그 학생을 불러 사정을 듣고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재시험 기회를 주어 학점을 조정했다. 이 무감독 시험 사건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내게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고 학생들과 나는 더욱 돈독한 사제 간의 정을 느끼게 됐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