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문성모 (9)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 진행과 동시에 음악학도 병행

입력 2025-06-05 03:04 수정 2025-06-07 09:57
문성모(왼쪽) 목사가 독일 유학 시절 친구 마틴과 함께 뮌스터대 근처에서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문 목사 제공

“당신을 내 제자로 받겠습니다. 대학에 등록하고 나를 만나러 오세요.” 한국 방문 후 독일어 어학 과정을 마친 나는 뮌스터대 신학부의 마틴 블린도우 교수에게 지도받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돼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뮌스터대 신학부에서 예배와 교회음악을 가르치고 있었고 중국에 오래 있었던 경험으로 한국인인 나를 친절하게 맞아줬다.

우선 신학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 필요한 고전어를 다시 수강하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대학이 한국에서 받은 학점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전어 시험은 학교가 아닌 뮌스터시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고전어가 필요한 다른 학과 학생들 수백 명이 함께 치르는 시험이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교수 5명이 진행하는 구술시험을 봐야 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험을 모두 통과했으니 이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행히 나는 한 번의 낙오 없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시험에 합격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뮌스터대 신학부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진행하면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이웃 도시 오스나부뤽대의 교육문화학부에 다시 등록해 음악학에 관한 논문 준비를 병행했다. 내 관심사는 예배와 음악을 한국화하는데 필요한 독일의 역사적 자료와 방법론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스나부뤽대에서 나중에 시작한 음악학 박사학위(Dr. Phil.)를 먼저 끝내게 됐다. 반면 뮌스터대 신학박사 과정은 예상보다 늦어졌고 지도교수가 은퇴하면서 더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수료로 마치게 됐다.

내가 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독일 친구 중에 특히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마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방을 제공해 아내가 독일에 오기 전 약 3년을 함께 생활했던 절친이었다. 그는 내 부족한 독일어 실력을 많이 보충해 줬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채식주의자였다. 본래 정치학을 공부했으나 나의 권유로 방향을 바꾸어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됐다.

또한 유학 기간에 대전중 동기인 유상현 박사를 만나게 된 것과 오르간 제작자 홍성훈 마이스터와 음악적 대화를 나눈 것, 백경홍 목사와의 신학적 담론,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과 편지 교류도 뜻깊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것도 잊을 수 없다. 또한 칼스루에한인교회에서 목회하며 자궁암 환자를 기도로 치유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독일 유학 중 나는 두 딸을 얻었다. 첫째 딸 예인은 1988년생, 둘째 딸 예지는 1990년생이다. 모두 뮌스터 라파엘 병원에서 태어났다. 1993년 아이들이 여섯 살과 네 살이 되던 해 나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의 길도 인도해 주소서.” 나는 지난 10년간의 독일 생활을 돌아보며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유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