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박 6일의 크루즈 여행 짐은 단출했다. 20인치 기내용 캐리어 안에 간단한 옷가지와 수영복, 운동화 정도가 넉넉히 들어갔다. 작은 가방의 무게가 묵직했던 건 책이 5권이나 들었기 때문이었다. ‘효도 여행’으로 잘 알려진 만큼 배 안에서 즐길 콘텐츠가 많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출발 전 크루즈 여행에 대한 인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갑판 위 선베드에 누워 바다의 반사광을 조명 삼아 하는 독서는 그간의 피로를 씻어주는 ‘힐링’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을 시간은 없었다. 배 위엔 힐링만큼이나 ‘도파민’이 넘쳤다. A3 종이를 일정으로 꽉 채운 선상 신문을 보며 바다 위 하루를 빽빽하게 계획하는 것부터가 해상 여행의 시작이었다.
지난달 25~30일 코스타세레나호를 타고 동아시아를 여행했다. 부산항에서 출발해 대만 지룽, 일본 사세보를 거쳐 다시 부산항에 돌아오는 코스다. 6일 중 2일은 전일 해상에서 보낸다. 기항지 관광도 좋지만, 크루즈 여행의 정체성은 이 대형 유람선 자체다. 일단 크루즈를 탔다면 길이 290m에 전폭 35m, 총톤수 11만4000t의 크루즈를 구석구석 둘러보길 추천한다. 14개층, 5개의 레스토랑과 10개의 바·라운지, 1500석 규모 대극장, 그리고 수영장 디스코장 헬스장 면세점 카지노까지 부지런히 다니지 않으면 전부 즐기지 못한 채 배에서 내려야 하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
효도 여행이란 명성에 맞게 2500여명 승객 중 상당수는 5070세대다. 자녀, 손자녀까지 가족 단위로 함께 온 승객도 흔히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가 운영하는 만큼 식사는 이탈리아식 정찬이 제공되지만, 김치가 갖춰졌고 비빔밥 등도 선택할 수 있다. 가수 이광조, 조엘라 등의 공연이 펼쳐졌고 저녁마다 댄스파티가 열리는 라운지와 디스코장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자(父子) 여행을 온 라경석(56)씨는 ‘1일 3스파’를 즐겼다. 넓은 바다를 볼 수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한 후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었다. 그는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아들과 함께해서 더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 라현민(26)씨는 갑판 위 농구장에서 낯선 승객들과 점수 내기 게임을 했다. 곳곳마다 인사하는 새 친구들이 생겼다.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도 크루즈는 좋은 선택지다. 아내, 딸과 함께 온 이동혁(45)씨는 크루즈를 선택한 이유로 짐을 쌌다가 다시 푸는 번거로움 없이 여러 장소를 여행할 수 있다는 장점을 꼽았다. 이씨의 딸 예나(12)양은 수영장을 매일 즐겼다. 갑판 위 미끄럼틀이 있는 수영장은 이양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그 외에도 선상에선 서커스, 뮤지컬 등의 공연과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 게임 등의 콘텐츠를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든 바다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크루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발코니가 있는 객실에선 일출부터 일몰, 밤바다까지 원하는 만큼 바다를 볼 수 있다. 갑판 위에서 바다의 수평선을 보며 하는 산책도 색다르다.
기항지 여행은 하룻낮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도심과 멀지 않은 항구에 내려서 관광하고 기념품을 사오기엔 충분했다. 대만 지룽은 타이베이와 가까워 타이베이 101타워, 시먼딩 등 시내를 둘러볼 수 있다. 일본 사세보는 근처 ‘도자기 마을’ 아리타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미군 기지가 있었던 사세보 시내에선 가게마다 개성 있는 레시피를 가진 ‘사세보 버거’를 먹어보길 추천한다.
“그리스 출장서 사업구상… 한국형 크루즈 도입”
국내 첫 ‘전세선’ 상품 운영 백현 롯데관광개발 대표
국내 첫 ‘전세선’ 상품 운영 백현 롯데관광개발 대표
한국 여행사의 크루즈 상품은 해외 선사에서 빌려온 ‘전세선’으로 운영된다. 지난달 25~30일 운항한 코스타세레나호 여행도 롯데관광개발이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의 배를 전세로 운영하는 상품이다. 전세계에서 전세선 상품을 처음 도입한 곳이 롯데관광이다.
백현(사진) 롯데관광개발 대표이사(사장)는 지난달 29일 코스타세레나호 베스타 레스토랑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2008년 출장으로 그리스 산토리니에 갔다가 크루즈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울릉도 크기만 한 작은 섬에 연간 방문객이 2500만명에 달한다는 말을 듣고 의문을 가졌을 때 가이드가 크루즈를 가리켰다”며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크루즈가 들어오면 외국인 관광객도 늘고 지역경제도 활성화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세선은 선원, 직원과 콘텐츠도 함께 빌리는 개념이다. 한국에 맞는 상품을 만들려면 선사 측과 협의가 필요했다. 백 대표는 “한국인 입맛에 맞는 메뉴를 개발하고 기항지 투어도 롯데관광 자체 투어로 진행하며 노하우를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여러 위기에도 롯데관광은 크루즈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백 대표는 “우리나라의 크루즈 인프라 구축에 기여한 게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자부했다. 지금은 부산을 비롯해 7개의 항구에서 크루즈가 출항한다. 롯데관광은 13년간 53번 크루즈를 운항했고 6만여명의 승객을 태웠다.
지룽·사세보=글·사진 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