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디지털 제품 여권(DPP) 제도 시행이 2년도 채 남지 않았지만 국내 산업 데이터 보호를 위한 한국형 플랫폼 구축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으로 진행된 ‘DPP 대응 플랫폼 구축 가이드라인’ 용역이 지난 4월 30일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과제는 해외 데이터 스페이스 선진 사례와 기술을 조사·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대한상공회의소, 김앤장 법률사무소, SK C&C가 컨소시엄을 이뤄 사업을 진행했다.
DDP는 EU에 유통되는 모든 제품에 대해 생산·유통·판매·사용·재활용 등 전체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로 수집·저장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공유하는 제도다. 오는 2027년 2월 배터리 산업을 시작으로 순차 적용될 예정이다.
데이터 스페이스는 제조 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업 간 거래(B2B) 데이터가 모이는 플랫폼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독일의 ‘카테나X’다. 독일은 약 5000억원을 투입해 EU에서 통용되는 플랫폼을 출범시켰다. DPP 제도 시행을 위한 사전 인프라 구축 작업이다.
이는 산업 데이터 시장 주도권을 쥐려는 목적이 크다. 전체 데이터 시장의 90%에 해당하는 산업 데이터는 아직 특정 국가가 장악하지 못한 영역이다. EU는 교역 상대국에 카테나X가 인증한 DPP를 의무화할 방침이다. 별다른 대비가 없으면 국내 제조업체 역시 EU에 제품을 수출할 때 카테나X를 이용해야 한다. 산업계는 산업 데이터가 카테나X 등 특정 국가의 플랫폼에 종속될 경우 막대한 수수료 지출과 더불어 기업의 제조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주요 제조국이 데이터 스페이스 ‘홀로서기’에 나선 이유다. 일본은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자동차 기업들과 배터리 관련 기업 등 50여곳이 참여하는 독자 플랫폼 ‘우라노스 에코시스템’을 만들었다. 중국도 조만간 자체 플랫폼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EU는 일본이 카테나X의 대항마를 개발하자 결국 두 플랫폼이 서로의 DPP를 인증할 수 있도록 했다. 우라노스를 동등한 플랫폼으로 인정한 셈이다.
반면 한국의 대응은 지지부진하다. 이번 DPP 대응 플랫폼 구축 가이드라인 과제는 겨우 일본, 독일 등의 데이터 플랫폼을 뜯어본 것에 불과하다. 아파트 공사에 비유하면 조감도가 나온 정도다. 시공사 선정, 공법 확정 등 갈 길이 멀다. 독일은 카테나X 개발에 10년, 일본은 우라노스 구축에 5년 이상이 걸렸다. 이에 정부는 DPP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플랫폼 구축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과 산업 구조가 비슷한 일본의 우라노스 모델을 벤치마킹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조기 대선도 적기 대응을 늦추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산업부 등 주무 부처가 조속히 예산 작업을 마쳐야 내년부터 플랫폼 구축 전 사전 기획 과정인 정보화전략계획(ISP) 과제를 시작할 수 있지만 ‘경제 컨트롤타워’가 멈춰선 영향으로 예산 확보가 불투명해졌다.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 부처 담당자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재계는 최악의 경우 EU 규제가 시작되는 2027년부터 실질적인 데이터 플랫폼 개발이 진행될 수도 있다고 본다.
재계 관계자는 “당장 예산을 투입해 데이터 플랫폼 개발에 돌입해도 DPP 시행 전에 실질적 가동이 어렵다”며 “EU 무역장벽 대응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면 국내 제조업체가 피해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