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괴뢰국

입력 2025-06-04 00:40

괴뢰(傀儡)는 허수아비 괴(傀), 인형 뢰(儡)를 써서 꼭두각시를 뜻한다. 남에 의해 조종돼 정치적 자율성을 상실한 괴뢰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통치를 정당화하거나 간접 지배를 실행하는 수단이었다. 7세기 후반 신라는 삼국 통일 뒤 고구려 유민의 불만을 달래고 백제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구려 왕족 안승을 내세워 보덕국을 세웠다.

일본은 1932년 만주사변 직후 국제사회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나치 독일은 유럽에 프랑스의 비시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 노르웨이의 크비슬링 정권 등 괴뢰 정권을 줄줄이 세웠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민당 정권은 흑인을 격리시키기위해 반투스탄이란 자치령 겸 괴뢰국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도 괴뢰국이 존재한다. 튀르키예의 통제를 받는 북키프로스가 대표적이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괴뢰국’으로 공식 규정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체 선거와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자율성과 종속성이 혼재된 상태다. 괴뢰국이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복잡한 국제 질서 속 외교적 도구로도 작동하고 있는 사례로 꼽힌다.

남한은 분단 이후 수십 년간 북한으로부터 ‘미제의 괴뢰’라는 낙인을 뒤집어썼다. 그런데 최근 노동신문 조선중앙TV 등 북한 매체에서 ‘괴뢰 한국’이라는 표현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남조선’, ‘괴뢰’ 대신 ‘한국’, ‘한국군’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김정은도 연설에서 ‘한국’을 언급했다. 이를 두고 6·3 대선으로 등장하는 새 정부를 겨냥한 화해의 제스처일 수도 있다는 기대섞인 해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 보다는 남한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않겠다는 의도가 더 강하다는데 방점을 찍는다. 괴뢰가 민족의 배신자라는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란다. 김정은이 지난해 말 “남북은 더 이상 동족이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고 선언한 것과도 연결한다. 새 정부는 이처럼 멀어지려고만 하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지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