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때때로 삶보다 죽음을 원하기도 합니다.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이런 죽음은 도피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다른 죽음을 말합니다. 도피가 아니라 간절히 열망하는 죽음입니다. 삶보다 더 나은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은 오직 하늘 소망을 가진 성도만 바랄 수 있습니다. 하늘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삶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하늘 소망은 오늘 주어진 삶에 의미와 사명을 불어넣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소망을 가진 성도의 삶은 뭘까요.
죽음의 견지에서 사는 삶입니다. 본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합니다. 유익한 죽음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오늘의 삶은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삶이 고귀한 이유는 삶을 통해 더 나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삶을 죽음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면 삶보다 더 나은 죽음을 기다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더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삶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영원히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 천국을 사모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배가 힘든 사람이 어찌 영원한 예배가 있는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삶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일 때에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4)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해줍니다. 첫째 내가 예수를 믿어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숨 쉬는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기회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자녀로서 영적 성숙과 성장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복음이 필요한 자에게 바울과 같은 유익한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둘째 내가 누군가를 예수 믿게 해서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혹시 아직 우리 가족 중에 주님을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물을 때 “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정확한 말일 것입니다. 가족뿐 아니라 나를 통해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유익한 선물로 드려지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우리 모두 하늘의 소망으로 삶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며 오늘 하루를 가득 채우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장재찬 목사(서울 장충교회)
◇장충교회는 금요철야로 서울 중구 지역에서 말씀과 기도의 불씨가 돼 부흥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교회,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