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서 분실한 휴대전화
노련하게 찾아… 곤경 빠진
사람에 공감하는 게 유능함
노련하게 찾아… 곤경 빠진
사람에 공감하는 게 유능함
잘한다고 자부한 게 있다. 지하철에서 졸다가, 내릴 때가 되면 귀신같이 깨어난다. 그래서 졸다가 하차할 역을 지나친 일은 없다. 나름의 능력인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지난 금요일. 지친 현대인을 따뜻한 햇살로 보듬어 주는 오후 2시. 당산역을 지날 때 쏟아지는 햇살을 이불 삼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부커상 최종 후보자였으나 아쉽게 떨어졌다는, 내 삶과 하등 상관없는 꿈을 꾸다가 눈을 떠보니 하차할 역이었다. 막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전광석화의 속도로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을 잽싸게 낚아채서 닫히려는 양 문틈으로 내 몸을 집어넣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졸다가 내리는 거에 관해서는 천재야(문학상은 못 받았지만).’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가방을 챙기고 시간을 보려니, 아뿔싸!
전화기가 없었다. 평소 아날로그적 삶의 효용성에 대해 주변에 설파하고 다녔으나, 웬걸. 휴대폰 케이스 뒷면에 신용카드까지 꽂아둔 터라 순간 눈앞에 창세 이전의 혼돈과 암흑이 펼쳐졌다. 식은땀이 나고, 맥박도 빨라졌다. 다행히 역내 호두과자 사장님이 전화기를 빌려줬다. 누군가 받아주길 바라며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내 전화기는 놀이공원의 미아처럼 홀로 온몸을 떨며 울어댈 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역무실로 가니, 얼굴에 ‘나 능숙’이라고 쓴 듯한 역무원이 하차한 차량 번호를 아느냐 물었다. 하여,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부커상 탈락의 회한을 삼키던 장소로 다시 가봤다. 당연히 정확히 알아낼 수 없었다(대체 졸다가 내린 어느 누가, 하차한 칸의 번호까지 기억한단 말인가).
‘나 능숙’ 역무원은 익숙하다는 듯 내 하차 시간을 추정해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객차 번호를 근거로 CCTV를 돌려봤다. 그러다 화면에서 유독 삶의 의욕이 1g도 없는 심드렁한 한 현대인을 만났으니, 나였다. 나는 개성 없는 글을 쓰는 작가답게 군중 속에서 무색무취한 존재로 하차하고 있었다. 그 영상을 근거로 객차 번호를 알아내려 했으나 무슨 영문인지 바닥에 쓰인 그 칸의 번호만 흐릿하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문학가다운 기지를 발휘했다. 안전을 위해 설치된 유리 벽에는 시가 쓰여 있고, 어느 칸에 어떤 시가 인쇄됐는지 어딘가 기록돼 있으리라. 하여 CCTV 화면을 보며 “멀리서 봐도 행갈이가 잘 안 된 게, 어쩐지 서사시 같지 않나요”라며 셜록 홈스식 접근을 했으나, 이 참신한 의견은 침묵 속에서 묵살됐다. 그때 ‘난 더 능숙해’라는 표정의 선배 역무원이 유리 벽에 쓰인 객차 번호를 파악했다(아마, 내가 유리 벽의 시에 주목한 것에 영감받았으리라).
번호를 파악하니,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 능숙’ 선생은 잽싸게 내가 탔던 차량 번호를 파악해 현재 그 열차가 어느 역을 통과하는지 알아냈다. 그러고는 곧 도착할 역의 역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열차의 문이 잠시 열리면 (멍청한) 승객이 내린 차량에 후다닥 들어가 (여전히 멍청한) 승객이 놓고 내린 휴대전화를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물론 제한된 시간 내에 찾아야 했으니, 승객이 직접 앉은 자리와 전화기를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선반인지, 좌석인지, 바닥인지 특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때, 나는 놀라운 집중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지하철 시’를 근거로 접근한 수색 협조 실패를 만회했다). 결국은, 휴대전화를 찾았다.
역사를 나오니 희망 섞인 오후의 햇살이 내려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잘하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졸다가 내리는 것마저 못하니). 반면에 역무원들은 실로 유능했다. 따져보니 이는 내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처럼 인식해 준 데서 기인했다. 호두과자 사장님도 마찬가지일 터. 타인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생각. 즉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 유능함을 낳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능력은 그저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유일한 능력이었지만 잃어버린 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