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불의한 저한테까지 오시게 됐어요.”
법원 조정실에 마주 앉은 목사님과 장로님께 인사를 건넸다. 교인 수가 몇 십명 남짓한 작은 교회에서 목사님파와 장로님파가 나뉘어 결국 소송에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한 건물 안에서 따로따로 예배를 드리다 장로님 측이 교회 문을 걸어 잠그자 쫓겨난 목사님 측은 창문을 부수고 마당에서 큰소리로 집회를 열었다.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됐다.
내가 건넨 인사에 두 분은 멋쩍게 웃었다. “어찌 성도끼리 다툼을 세상의 불의한 자 앞에서 해결하느냐”는 성경의 고린도전서 6장 1절 구절을 빗댄 농담이었다.
교회는 작았지만 오래된 교회 건물은 수십억원의 가치가 있었다. 그 소유와 처분을 둘러싸고 다툼이 시작된 듯했다. 교회라고 어떻게 분쟁이 없을 수 있을까. 도리어 ‘교회이기에 다툼이 없어야 한다’는 기대가 갈등을 키우기도 한다.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때로는 갈라설 수도 있다. 그런 시각에서 출발할 때 교회 분쟁도 평화를 향한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방이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맞서는 두 분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자,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부부가 이혼할 때도 재산과 자녀 양육에 대해 협의하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지요. 누가 어느 무리를 양육할지, 재산은 어떻게 나눌지 함께 논의하셔야죠.”
뜻밖의 비유에 계속 정색을 하던 장로님도 살짝 웃으며 누그러졌다. 그리고 “건축 당시 기여도도 없는 새 신자들과 목사님에게 재산을 떼어주는 건 어렵지만, 목사님 쪽에서 독립할 때 필요한 금액을 제안하면 검토해 보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목사님도 “그런 방향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면서도 한 번 교인들과 독립하는 방법에 대해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양측 변호사들이 계속 협의하기로 하며 조정은 속행됐다. 조금 진전된 듯 보였지만 교회 분쟁 특성상 대법원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도 작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조정을 마무리하며 말씀드렸다. “혹시 이번에 조정이 안 되더라도 재판 중에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면 다시 조정 요청해 주세요. 저도 생각날 때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당장 조정이 성립되지 않더라도 조정실을 찾아온 이들의 귀한 시간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최근 나의 기도 제목이자 목표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요”라고 반문하면, “그럼 이제부터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라고 격려해 본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한 번에 풀 수는 없지만, “한 번 이런 방향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다면 조정자의 역할은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재판은 과거를 따져 시비를 가리지만, 조정은 지금부터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를 함께 고민한다. 그래서 법정에서 치열하게 맞서 싸우던 사람들도 조정실에선 하나의 해결책을 만들기 위해 서로 협력하게 된다.
치열하게 다투던 우리 사회도 이제 조정의 자리로 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어제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됐다. 어떤 이들에게는 환영할 일이겠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결과일 수 있다. 지금껏 서로 상대방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불안과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교회 분쟁 사례에서도 보았듯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야말로 우리를 다음 시대로 이끄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