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난 아침이다. 국민은 이날을 간절히 기다려 왔다. 새 대통령의 탄생에 대한 기대보다는, 지난 12월 3일 이후 계속된 불안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정치의 혼란이 경제침체를 가져온다는 사실, 법치가 흔들리면 사회가 온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아는 국민이기에 염려는 더욱 컸다. 아침마다 들려오는 자극적인 뉴스, 대선 후보들 간의 날 선 공방과 책임 회피, 극단적인 언어들은 국민의 마음을 지치게 했다. TV조차 마음 편히 보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정말 힘겨운 시간을 지나왔다. 모두가 수고 많았다. 정치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정치인들을 선택한 것도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표를 주고, 여론조사 버튼을 누르고,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켜 그들을 키운 것이다. 만약 우리 시대 정치에서 괴물의 모습을 보았다면 우리 안에도 그러한 괴물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 책임이 단지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괴물로 평가받는 아돌프 히틀러 역시 국민의 투표와 열광적인 군중의 지지 속에서 등장하고 성장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등장을 연구하면서 그 뿌리를 사람들의 ‘외로움’에서 찾았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온 지구가 경악했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이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립”이라고 경고했다. 외로움은 건강을 심각하게 해친다. 전혀 운동하지 않는 것보다 고립이 건강에 더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한 조직이나 사회의 건강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에서 속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는 이들은 일에 몰입하기 어렵다. 연봉은 높은데도 이직률이 높은 직장이 적지 않은 이유다. 정치에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2016년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통과된 충격 이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포퓰리즘 현상 역시 사람들이 외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분석이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정보와 미디어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것 같지만 정작 외로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잘못된 확신 속에서 과격한 선택을 하게 된다. 노년층의 외로움이 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통계가 우리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더 고약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나친 외로움은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과 정치적 안정까지 흔들어 놓고 있다.
‘경제성장을 절대가치로 여기며 달려온 시대’는 이제 막다른 골목이다. 경쟁은 격화되고 그 그늘에서 소외된 이들의 신음은 깊어간다. 청소년들은 급우를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보며 자라간다. 그들 앞에는 인간이 기계와 비교당하며 경쟁해야 하는, 더 차갑고 더 메마른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면 그것은 돌봄의 시대가 돼야 한다. 매사에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상대를 적으로 심지어 악마로 몰아세우는 세태를 극복하는 힘은 돌봄의 영성에 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영성이다. 몸으로 섬기는 현장, 사람의 체취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과 다름을 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의외로 ‘서로’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돌보는 공동체를 원하셨다. 그 공동체가 세상의 빛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새 아침은 대통령을 바꾸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돌봄의 사람이 될 때, 서로 존중하고 돌보는 태도가 우리 사회의 일상적 문화가 될 때, 우리는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