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2017년 지난 19대 대선에 첫 도전하며 자신을 “변방의 장수”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후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해 정치적 몸집을 키우고 민주당 내 지배력을 넓혀 현재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어냈다. 이 당선인은 3년 전 20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사법 리스크’ 부각 등으로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내 인생은 바닥까지 내려가 박차고 올라오기의 연속이었다”는 회고록의 말처럼 풍전등화의 상황을 거듭 돌파하는 생명력을 보여줬다.
빈농의 아들에서 대권 주자로
이 당선인은 1964년 경북 안동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해 13세 때부터 소년공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당시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쪽 손목 관절이 끼는 사고를 당해 ‘굽은 팔’ 장애가 생겼다. 이 당선인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정고시를 결심했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80년 4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후 공장 일과 학업을 병행해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 4년 뒤에는 사법고시(사법연수원 18기)에도 합격했다.
이 당선인은 사법연수원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고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뒤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2003년 말 성남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하자 시민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시의회에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상정되도록 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이 조례안을 부결시켰고, 이 당선인은 거세게 항의하다 특수공무방해죄로 고발당했다. 2004년 3월 성남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숨어 지내던 이 당선인은 “부정한 기득권자들이 좌절시킨 시립 공공병원의 꿈을 성남시장이 돼서라도 반드시 이뤄보겠다”며 현실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2006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성남시장 선거에 나서며 정치에 발을 디뎠다. 초기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2006년 선거에서 패했고, 2008년 총선에 다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지만 또 한 번 낙선했다. 하지만 2010년 성남시장에 다시 도전해 당선됐고, 2014년 재선에도 성공한다. 이 당선인은 2017년 ‘변방의 장수’로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하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당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0.3% 포인트 뒤진 21.2%로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향후 대권 주자로서의 정치적 잠재력을 보여준 선방으로 평가됐다.
尹에 패배 뒤 와신상담
이 당선인은 2018년 경기지사로 취임한 뒤 ‘기본소득’을 비롯한 자신의 간판 정책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거치며 대중에게 각인시킨 ‘강력한 추진력’은 그의 큰 정치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10월 이낙연 전 대표를 누르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2022년 3월 20대 대선에서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0.73% 포인트 차이로 패배했다.
이 당선인은 좌절 속에서도 바로 다음 걸음을 내디뎠다. ‘방탄 출마’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같은 해 6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그는 본격적으로 당내 장악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두 달 뒤인 그해 8월 당대표마저 거머쥐었다.
그러나 사법 리스크가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검찰이 2023년 대장동 의혹 등으로 구속영장을 두 차례 청구하며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검찰이 그해 2월 국회에 첫 번째로 보낸 체포동의안은 본회의에서 부결되면서 한숨을 돌렸다. 이 당선인은 검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윤석열정부의 폭정에 항거하겠다”며 같은 해 8월 31일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검찰이 2개월 뒤 국회로 보낸 2차 체포동의안 표결을 하루 앞두고 그간의 입장을 바꿔 “부결해 달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냈지만, 끝내 체포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이 후보는 벼랑 끝에서 생환할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 당선인은 지난해 1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방문했을 때 흉기 피습을 당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다.
위기 넘기며 대세론 굳히기
파도처럼 반복해 몰려온 위기는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단식과 구속영장 기각, 흉기 피습 사건을 거치면서 지지층이 결집했고, 이 당선인은 이를 기반으로 당내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됐다. 민주당은 비명(비이재명)계 인사들이 공천에서 탈락한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의석 175석을 얻는 기록적인 승리를 거뒀다. 다만 사법 리스크는 족쇄처럼 발목을 잡았다. 이 당선인은 지난해 11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에서 피선거권 박탈형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며 또다시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하며 이 당선인의 정치 여정도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로 6·3 조기 대선이 현실화됐고, 이 당선인은 당내 경선에서 역대 최고 득표율로 승리하며 대선 후보가 됐다. 지난달 1일 대법원이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며 다시 한번 위기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의 기세를 탄 이 당선인은 이마저 돌파하고 대권을 향해 나아갔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