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온이 일상이 되면서 유통업계의 달력이 달라지고 있다. ‘계절 장사’ 대신 날씨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기온 장사’가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편의점은 기온 1도 차이에 매대를 바꾸고, 패션업계는 사계절의 경계를 허물어 ‘시즌리스’ ‘다계절’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날씨는 변수를 넘어 매출을 움직이는 새로운 전략 지표가 됐다.
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세븐일레븐과 CU 등 주요 편의점은 이상기온에 대응한 날씨 기반 판매 전략을 운영 중이다. 세븐일레븐은 상품별 ‘임계온도’에 따라 매대 진열과 판촉을 조정한다. 임계온도란 상품의 판매량이 급격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시점의 기온이다. 예컨대 탄산음료는 24도, 생수·스포츠음료는 29도, 튜브형 아이스크림은 기온이 31도가 되면 판매량이 뚜렷하게 증가한다. 반면 라면·소주 등은 계절 영향이 적은 ‘항온 상품’으로 분류된다.
이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세븐일레븐은 ‘1000원 맥주’ 행사를 예년보다 한 달 앞당긴 지난 3월 시작했다. 당시 기온이 맥주 임계온도(26도)를 넘기며 수요가 급증했고, 그 결과 2주 만에 40만 캔이 판매됐다.
CU는 각 점포의 판매정보시스템(POS)에 2시간 단위 기상청 예보와 판매 데이터가 전송되는 체계를 갖췄다. 이에 따라 점주는 발주와 진열을 실시간으로 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맑은 날 비 예보로 전환되면 우산·비옷을 전면 배치하고 아이스크림·음료 발주는 10~15% 줄이는 식이다. 반대로 기온이 떨어지면 따뜻한 캔커피를 진열해 수요를 유도한다.
편의점업계 한 관계자는 “예전엔 동·하절기 전환 시기에 맞춰 ‘매대 옷을 갈아입는다’고만 표현했는데, 요즘은 날씨에 따라 한 달에도 수차례 매장을 조정해야 할 정도”라며 “매출 확대와 폐기율 절감을 동시에 노리기 위해 ‘기온’이 핵심 변수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는 패션산업의 생산·유통 구조에도 대대적인 개편을 촉발했다. 간절기 실종과 여름 장기화로 재고 부담이 커지면서, 국내 주요 패션 대기업들의 올 1분기 실적은 부진했다. 한섬의 지난해 재고자산은 6243억원으로 총자산의 35.75%에 달했고, 신세계인터내셔날도 24.16%(3222억원)를 기록했다.
이에 패션업계는 시즌리스 상품과 냉감 소재를 늘리고, 판매 반응에 따라 생산량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반응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협력사와 함께 ‘기후변화 대응 TF’를 꾸려 중장기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LF와 코오롱FnC는 봄·여름 상품 출시 시점을 1~2월로 앞당기고, 여름철 주요 품목의 물량을 배로 확대했다.
식품·뷰티업계 역시 날씨 변화에 맞춘 제품 재정의에 나섰다. 선케어 제품은 ‘여름 한정’이 아닌 ‘연중 필수템’으로 자리 잡았다. 저출생으로 얼어붙었던 빙과류 시장은 폭염에 따른 수요 증가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정부 역시 채소와 생선 가격이 뛰는 ‘베지플레이션’ ‘피시플레이션’ 등 이상기후에 따른 공급망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수급 예측 및 사전 확보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날씨에 민감한 소비재 시장에서는 기상이변이 잦아질수록 기업의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기후 기반 머천다이징과 날씨에 맞춘 서비스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됐고, 살아남는 기업만이 앞으로의 시장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다연 기자 ida@kmib.co.kr